'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 출간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패션·바리케이드 전술·박람회·광고·매춘·도박·영화·사진 등을 통해 19세기 자본주의의 속살을 총체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기념비적인 걸작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아케이드, 혹은 아케이드라는 건축적 형태를 통해 자본주의를 탐색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이었다.

그에 따르면 아케이드 안에서 사람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와 상관없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전시되어 있던 상품을 쾌적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이런 아케이드에 끊임없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벤야민은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때로는 자본주의가 내뿜는 눈부신 휘광에 자신도 모르게 경도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압도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모습은 이 책이 이뤄낸 여러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자본·권력·노동…도시 외관 속에 숨겨진 것들
리처드 윌리엄스 에든버러대 시각문화학과 교수의 신간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현암사)는 도시 건축물을 통해 도시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처럼 도시의 시간을 오랜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영원히 고정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조명하지 않는다.

그런 접근방식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맹목적 숭배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낭만주의 대표 시인 바이런은 베네치아가 지닌 몰락이라는 관념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베네치아 특유의 쇠락해가는 도시 이미지를 사랑했다고 적었다.

저자는 벤야민의 방식을 택한다.

저자는 자본·정치 권력·성적 욕망·노동·폭력·문화 같은 것들에 주목해 도시를 분석한다.

그는 도시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자취를 따라 변해왔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도시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본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도시의 공간이 계급과 직업에 따라 나뉘는 일은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도시는 사회적 계급에 따라 구획화가 시작됐다.

자본·권력·노동…도시 외관 속에 숨겨진 것들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보면 이런 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엥겔스는 자본이 서로 다른 계급에 각각 다른 공간을 부여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책에서 "맨체스터의 부자들이 몇 년간 매일 이 도시를 드나들면서도 노동자 구역을 한 번도 지나치지 않고, 아니 아예 노동자를 한 명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언급했다.

19세기 폭주하던 자본주의가 수정된 현대 자본주의에도 이런 자취는 남아있다.

저자는 "자본은 깨끗하고 번듯한 중앙도로와 같은 공간은 겉으로 보이도록, 노동자 계급의 불길한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도록 도시를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이어 "자본은 한곳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집중된 자본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집중된 부의 이미지가 환영을 만드는 것은 현재 세계도시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정치 권력도 도시를 구분하는 주요 요소다.

권력의 권위는 건축물의 거대함, 기하학적 구조, 질서를 통해 표현된다.

워싱턴 국회의사당, 내셔널몰,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 등이 그 예다.

자본·권력·노동…도시 외관 속에 숨겨진 것들
이렇게 현대 도시에서도 권력이 건축물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과거와는 달리 노골적인 형태가 아니라 은밀한 방식으로 재현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성적 욕망 역시 도시 곳곳에서 피어나 도시를 변화시킨다.

뉴욕 허드슨강 동안의 첼시 부둣가는 1960년대까지 해상운송의 중심지였지만 이후 쇠퇴하면서 남성 동성애자들이 익명의 성적 파트너를 찾는 곳으로 변화했다.

노동이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는 노동이 사람과 사물의 특정한 흐름을 만들고, 하루의 리듬을 만들며 이미지와 정체성을 제공한다.

20세기 미국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회사 포드의 도시였다.

포드사의 공장들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 공장이 있는 도시들을 지배했다.

전쟁은 한 도시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수산업의 중심지가 됐고, 미국 거대 방산업체가 모이면서 초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문화도 산업화하며 도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도시의 외관은, 통제해서도 안 되고, 통제할 수도 없는 여러 프로세스의 결과"라며 "이 사실을 이해할 때야 우리가 사는 도시들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수연 옮김. 336쪽. 1만6천원.
자본·권력·노동…도시 외관 속에 숨겨진 것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