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디에고의 아내와 프리다의 남편
멕시코 500페소 구권의 모델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프리다 칼로(1907∼1954) 부부다.

일련번호가 있는 앞면에 리베라, 뒷면에 칼로가 각자의 작품과 함께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일자 눈썹의 칼로는 알아도 리베라는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이들이 살았던 시절 칼로는 '디에고의 아내'였다.

칼로가 리베라를 처음 만난 것은 15살 때였던 192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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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꿈꾸며 멕시코 최고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칼로는 학교에 벽화를 그리던 36살의 리베라를 만났고, 이후 1928년 지인의 주선으로 다시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이때 리베라는 이미 멕시코를 대표하는 벽화 화가였고, 칼로는 1925년 큰 교통사고를 겪고 병상에 누워 그림을 막 시작한 때였다.

대비되는 몸집 때문에 '코끼리와 비둘기'로 불렸던 리베라와 칼로 커플의 폭풍 같은 관계는 영화와 책 등을 통해 잘 알려졌다.

둘 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부정(不貞)의 정도로 치자면 칼로가 리베라에 댈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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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칼로는 "난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사고를 겪었다.

하나는 버스에 치여 바닥에 처박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다.

둘 중 디에고가 훨씬 더 나쁜 사고였다"고 말했다.

디에고라는 사고는 칼로를 32번이나 수술대에 눕게 했던 교통사고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겼지만 동시에 예술적 영감도 줬다.

칼로가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리베라와의 결혼 때문임도 부인하기 힘들다.

리베라에게도 칼로는 뮤즈였다.

둘은 서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디에고의 아내'일 뿐이었던 칼로는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레통에 의해 화가로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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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미국 뉴욕, 193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멕시코 작가 중 처음으로 루브르박물관이 그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53년 멕시코에서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서 칼로는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거장 남편의 위상에 가려있었다.

멕시코시티 시민 베레니세 에르난데스(41)는 "더 유명하고 더 높이 평가받아온 것은 늘 디에고였다.

학창 시절 디에고와 벽화주의는 비중 있게 배웠지만 교과서에 프리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폐 앞면이 리베라 차지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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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 칼로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무렵부터였다.

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칼로의 불꽃같은 삶과 그 삶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기 시작했다.

지난달 미국 뉴욕 경매에서 칼로의 그림 '디에고와 나'가 3천488만 달러(약 412억원)에 팔려, 리베라의 작품 '라이벌들'을 제치고 중남미 작가 작품 최고가를 쓴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혹자를 이를 두고 '칼로의 최후의 복수'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이제 리베라를 '프리다의 남편'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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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멕시코 바깥에선 이미 '프리다의 뚱뚱한 바람둥이 남편'이라는 이미지가 리베라의 예술적 성취를 가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칼로는 이미 홀로 우뚝 선 존재가 됐다.

칼로의 예술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챘던 리베라와, 예술가로서 남편을 존경했던 칼로는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을까.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누구의 남편이나 누구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인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커플로 말하자면, 디에고의 아내이고 프리다의 남편일 때 두 위대한 예술가의 서사가 더 완벽해지는 느낌이다.

칼로의 많은 자화상 중에서도 리베라의 얼굴이 이마에 함께 새겨진 '디에고와 나'가 중남미 최고가 작품이 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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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