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권형택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사장이 지난 4월 취임 후 임직원에게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은 ‘공공성과 공익성 강화’였다. 전세시장 불안 여파로 전세금이 집값보다 비싼 ‘깡통 전세’와 전세사기 피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HUG가 서민 재산권 보호를 위해 앞장서자는 취지였다. HUG는 주택 분양보증과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을 주 업무로 하는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이다.

권 사장은 “사회 초년생 시절 수년간 전세살이를 해 집 없는 서민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며 “깡통 전세와 갭투자(전세 낀 매매) 확산으로 위협받는 서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게 HUG의 최우선 과제”라고 했다. 그가 취임한 후 HUG는 임대보증금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료율을 인하하는 등 공공성 강화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민간 뱅커에서 공기업 수장으로

1968년생인 권 사장은 199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정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세운 벤처기업이 고전하자 우리은행에 입행했다. 그는 “우리은행에 들어가기 전 수입이 변변치 않아 전세금 구하러 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다”고 회고했다. 정부·공공기관 차원의 주거 지원 확대 필요성을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우리은행 투자금융본부에서 국내외 투자금융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그는 2008년 외국계 은행 HSBC의 기업금융본부 임원으로 이직했다. 이듬해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씨나인자산관리(C9 AMC) 투자운용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동산개발금융 프로젝트와 부동산 상품 개발 등을 진두지휘했다. 2008년 세계를 금융위기로 몰아넣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는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와 공적 기관의 역할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8년간 금융사에서 일한 권 사장은 2010년 공공 영역에 처음 발을 들였다. 씨나인자산관리에서 나온 뒤 인천시 산하 인천발전연구원(현 인천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시장 투자·금융 특별보좌관으로 선임됐다. 민간의 무분별한 투자를 막고 도시계획의 밑그림을 마련하는 게 특보의 책무였다.

경청하는 리더십 돋보여

금융·부동산 분야 전문성을 인정받은 그는 2012년 인천도시공사 산하 미단시티개발 부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면서도 공공성을 잃지 않는 게 당시 최우선 과제였다”고 했다. 3년간 영종도 북쪽 미단시티 개발을 총괄하던 그는 2015년 서울도시철도공사 전략사업본부장을 거쳐 2018년 경전철 김포골드라인운영 대표가 됐다. 민간과 공공에서 실무 경험이 풍부해 정부와 건설사, 임대사업자, 임차인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는 HUG 수장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권 사장은 자신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고 표현했다. ‘마음을 기울여 상대의 말을 듣고 그의 마음을 얻는다’는 의미다. 그는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에선 지속적인 성과가 나기 어렵다”며 “긴밀한 스킨십을 통해 직원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지난 7월 도입된 ‘청년이사제’는 권 사장의 이런 경영철학이 반영됐다. 그는 20~30대 젊은 직원 12명을 청년이사로 선발해 이들과 온·오프라인에서 대화할 수 있는 ‘핫라인’을 마련했다. 한 청년이사는 “사장님은 직원들 얘기를 듣는 데 집중하는 편”이라며 “‘페이퍼리스(paperless·종이 없는) 회의 개최’ 등 회의에서 제시된 아이디어 상당수가 회사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고 했다.

핫라인에서 나온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확대를 위해 친환경 인증 사업장과 건설사에 분양 보증료를 인하해 주자’는 의견도 권 사장 지시로 제도 도입을 위한 막바지 실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소통을 강조하는 그는 취임 한 달 만인 5월 HUG의 공적 기능 확대, 정부 대책 지원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 등을 담은 노사 합의문을 이끌어 냈다.

“전세보증금 보호에 총력”

권 사장은 취임 직후 ‘전세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세 세입자가 보증금을 떼이는 사고를 막기 위한 제도를 도입했다.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임대인 집을 압류해 전세사기 피해가 추가로 발생하는 것을 막는 한편, ‘악성 임대인’에 대한 형사 고발 및 재산 환수 방안도 마련했다. 그는 “대다수 전세사기 피해자는 전세보증금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라며 “임기(3년) 중 전세사기를 뿌리 뽑기 위해 강력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확대를 위해 작년부터 시행 중인 보증료 감면(70~80% 인하) 조치를 연장하도록 했다. 올 6월 주택도시기금법을 개정해 보증총액 한도를 자기자본의 50배에서 60배로 늘린 데 이어 9월에는 증자를 통해 3900억원의 자기자본을 확충했다. 작년 8월 시행된 임대보증금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에 맞춰 임대보증금 전담 영업팀 및 콜센터도 꾸렸다.

권 사장은 “임직원의 업무 능률을 높여야 대(對)국민 서비스의 질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보증보험 가입자가 단기간에 급격히 늘면서 콜센터 직원 업무가 가중되고 있다”며 “확대된 보증 수요에 맞춰 상담 전문 인력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내집 마련 안전판' 주택 분양보증…27년간 1086조 지원
올 전세보증보험 42조원…6년새 60배 가까이 늘어

수억원을 들여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건설회사가 부도가 난다면 어떻게 할까.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주택 분양보증은 이런 사고에서 분양 계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다. 1993년 설립된 HUG는 주택 분양보증과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민영주택 분양가 관리를 주 업무로 하고 있다.

분양보증은 건설사 등 주택사업자가 파산해 주택을 분양받을 수 없을 때 HUG가 대신 계약자가 낸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주는 보증 상품이다. 주택 30가구 이상을 선분양할 때 분양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률로 가입이 의무화돼 있다.

국내 유일한 주택 분양보증 전담 기관인 HUG는 지난 27년간 625만 가구(1086조원 규모)에 대한 분양보증을 통해 안정적인 주택 공급을 지원해 왔다. 이 기간 33만 가구가 분양 사고로 계약금과 중도금을 날릴 위기에 처했지만, HUG가 4조2684억원의 보증 이행을 통해 내집 마련의 꿈을 지켜줬다. 주택 분양보증 사고는 경기 변동에 민감해 경제위기 때 집중 발생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2010년 HUG는 전체 보증 이행의 55%에 해당하는 2조3639억원을 분양 이행 비용으로 썼다.

HUG는 최근 확산하고 있는 ‘깡통 전세’ 등 전세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공급도 확대하고 있다. HUG의 연간 전세보증 실적은 2015년 7221억원(3941가구)에서 올해(10월 기준) 42조7121억원으로 60배 가까이 급증했다. 카카오페이, 네이버 부동산 등과 협업해 보증 가입 채널을 다양화, 전세 계약자가 쉽게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작년 8월에는 임대인과 임차인이 함께 가입하는 임대보증금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를 시행했다. 작년 7월부터는 공공성 강화의 일환으로 주택 분양보증(50%), 전세보증(70~80%) 등 주요 보증 상품의 보증료를 감면해 주고 있다.

정부는 이달부터 공공택지에서 민간 건설사가 공급하는 아파트에 대해 사전청약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민영주택 추정 분양가를 검증하는 HUG의 공적 역할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권형택 HUG 사장은 “정부의 원활한 주택 공급과 서민 주거 안정을 지원해 공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권형택 사장은

△199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2000년 미국 미시간대 경영정보학 석사
△2002년 우리은행 입행(투자금융본부 팀장)
△2008년 HSBC 상무
△2009년 씨나인자산관리 투자운용본부장(전무)
△2010년 인천시장 특별보좌관
△2012년 미단시티개발 부사장
△2015년 서울도시철도공사 전략사업본부장(상임이사)
△2018년 김포골드라인운영 대표
△2021년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사장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