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시행…'저녁이 있는 삶' 아닌 '배고픈 저녁'됐다" [곽용희의 인사노무노트]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파이어족(경제적 자립을 통해 빠른 시기에 은퇴하는 것)' 같은 현상은 결국 근로시간은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을 중심으로도 주4일제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무작정 근로시간을 줄인다고 삶이 만족스러워 지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눈길을 끈다. 특히 저소득·저학력·비정규직일수록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함께 나왔다.

◆주52시간제, '삶의 만족도'는 못높여

김호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조교수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심재선 씨는 지난 8월 한국자료분석학회에서 발표한 '주52시간 상한제 도입효과 분석' 논문에서 "실 근로시간 단축이 특별히 근로자 삶의 만족도를 높이지는 않았다"는 취지의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자들은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자료를 실증 분석해 주52시간 상한제가 근로시간을 어느 정도 줄였는지를 연구했다. 주52시간제는 2018년 3월 근로기준법 개정 후 7월 1일부터 적용됐지만 유예기간을 거쳐 2019년 4월부터 부분 시행됐다. 연구는 2015년과 2017년, 주52시간제 적용 이후인 2019년의 근로시간 실태를 비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총 주당 근로시간은 2017년엔 45.42시간, 2019년에는 43.66시간을 기록해 2년 전에 비해 1.47시간이 줄었다. 주52시간제 도입 전에도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였지만, 제도가 도입된 2019년부터는 빠른 속도로 줄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초과 노동을 하는 근로자 비율을 살펴보면 변화가 도드라졌다. 주40시간을 초과해 노동을 한 근로자의 비율은 2015년엔 56%, 2017년 50%였지만 2019년엔 40%로 전년도에 비해 10%p나 감소했다. 주52시간 초과 근로자도 2015년 17%, 2017년 15%를 기록했지만 법 시행 이후인 2019년엔 8%로 크게 줄어들었다. 연구진은 "근로시간 단축 적용 시기가 유예된 기업에서도 줄어들었다"며 "국가 정책에 기업들도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근로시간 단축이 전반적인 생활 만족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연구진은 "실근로시간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생활 만족도 지수에선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만족도에 변화가 없는 이유로 '국가 정책에 따른 일률적 근로시간 감축'을 이유로 들었다. 연구자들은 "개별 기업 차원의 복지가 아니라 일괄 감소하면서 근로자 개개인의 만족도 개선에는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자마다 최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로시간이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개인의 유인구조에 따른 적절한 인센티브나 근로자 스스로 근로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유연근로제 등 맞춤형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기계적인 근로시간 단축보다는 근로시간에 상응하는 임금 보상이나 유연근로제를 강화하는 방안이 만족도 향상에 더 기여할 수 있다는 제언이다.

◆저학력·저소득 근로자들 "근로시간 단축, 남의 일"

근로시간 단축은 특히 저학력, 저소득 근로자들에게는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임상호 순천향대 부교수와 최태월 한국산업진흥원 대표가 지난 5월 '산업진흥연구'에 발표한 '직장인의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생활변화와 여가만족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 가량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삶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자 2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복수 응답 가능)에서 10명 중 4명 꼴(42%)로 '생활의 큰 변화가 없음'을 선택했고, 가사부담이 증가했다거나 심리적 부담이 늘었다는 대답도 각각 15.6%와 8.2%에 달했다.

1인가구의 경우 59.1%, 2인 가구의 경우 49.9%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대답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개인 만족도가 늘었다는 대답은 여성에선 54%, 남성에서는 30%를 조금 넘겨 남녀 간 큰 차이를 보인 점도 눈에 띄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여가만족도' 분석에서는 국민 두명 중 한명 꼴로 변화가 없거나 더 나빠졌다고 응답했다. 특히 중졸 이하 학력의 근로자의 약 73%, 고졸 이하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변화가 없다'고 응답했다. 종사자 지위 별로 보면 임시직 근로자의 63%가 변화가 없거다 더 좋아지지 않았다고 대답해, 정규직(46%) 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소득 구간별로 보면 100만원 미만 근로자의 82% 이상, 100~200만원 소득구간 근로자의 60% 이상, 200~300만원 사이 근로자의 56%이상이 '변화가 없다'고 응답했다.

반면 고연봉 근로자로 갈수록 만족도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600만원 이상 소득 근로자들은 62% 이상이 "여가만족도가 높아졌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300~400만원 사이의 소득을 가진 근로자들이 400~500만원이나 500~600만원 구간에서 소득을 가진 근로자들보다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결국 저학력, 임시직, 저소득 계층 근로자들은 근로시간 단축에도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떨어졌다.

현재 소득이 충분한 근로자들은 근로시간 단축 자체만으로도 삶이나 여가 만족도가 올라갈 수 있지만, 기본적인 소득이나 고용안정성이 낮은 경우엔 근로시간 단축은 남의 얘기일 수 있다는 방증이다.

여성학 연구가 이소진씨는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이란 저서에서 "(마트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이후 더욱 예측할 수 없게 된 근무시간으로 인해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느끼기 어려워졌다"며 "노동시간 단축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생활 시간의 활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일괄적인 근로시간 단축, 대기업부터 적용되는 각종 복지 정책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며 "저소득 근로자들의 상대적 박탈감만 불러온 게 아닌지, '저녁이 있는 삶' 대신 '배고픈 저녁이 있는 세상'이 열린 건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