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왕국' 맡자마자 코로나 직격탄…OTT·메타버스 날개로 위기탈출 지휘
지난해 2월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으로부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넘겨받은 밥 채펙은 ‘불운의 사나이’로 불렸다. CEO 취임 직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등 세계 곳곳에 있는 12개 디즈니랜드가 줄줄이 폐쇄됐다. 미국 전역의 영화관이 문을 닫고, 영화·TV 프로그램 제작이 ‘올스톱’되면서 엔터테인먼트 부문이 직격탄을 맞았다. 크루즈 사업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때도 살아남은 디즈니지만 코로나19 위기는 극복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로부터 1년10개월이 지난 현재 ‘채펙호(號)’는 순항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디즈니+)에 집중한 채펙 CEO의 전략이 활로를 뚫고 있다. 채펙 CEO 취임 당시 3000만 명 수준이던 디즈니+의 유료 구독자는 지난달 기준 1억1800만 명으로 급증했다. 넷플릭스가 구독자 1억 명을 확보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폭발적 증가세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집중

미국 엔터테인먼트업계는 채펙 CEO를 다시 주목하고 있다. 오는 31일 아이거 회장이 퇴임하면 채펙 CEO가 디즈니에 대한 모든 경영권을 쥐기 때문이다. 아이거 회장은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디즈니의 창작 부문을 감독해왔다. 채펙 CEO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시대가 변했고, 디즈니도 바뀌어야 한다”며 대대적인 혁신을 예고했다.

우선 디즈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무게중심을 TV·영화관 등 전통 미디어에서 OTT 플랫폼인 디즈니+로 옮긴다는 구상이다. 그는 OTT 플랫폼을 1930년대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골드러시’ 이후 가장 큰 혁신으로 보고 있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을 수직 통합한 체계를 의미한다. 영화 유통의 모든 과정을 장악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당시 우후죽순으로 스튜디오가 생겨났다.

채펙 CEO는 디즈니+에 힘을 싣기 위해 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TV 프로그램과 영화 배포를 담당하는 조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기존에는 새 영화가 나오면 스튜디오 책임자들이 극장에서 개봉할지, 스트리밍을 통해 출시할지 결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조직에서 배포 방식을 정한다. 채펙 CEO는 “기존 스튜디오 조직에 일을 맡기면 계속해서 모든 영화가 극장으로 갈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스트리밍 사업은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

‘신작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업계 통념도 깨뜨렸다. 영화 ‘블랙위도우’ ‘크루엘라’ 등 일부 작품을 극장과 디즈니+에서 동시 개봉했다. 채펙 CEO가 제안한 이른바 ‘데이 앤드 데이트’(동시 개봉) 전략 덕분에 디즈니+ 구독자가 크게 늘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디즈니의 미래 먹거리

채펙 CEO의 목표는 단순히 스트리밍 사업 규모를 키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첨단 기술과 엔터테인먼트를 융합해 디즈니의 사업 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스트리밍 시장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1위 OTT업체 넷플릭스는 220억달러, 디즈니+의 경쟁 플랫폼 HBO맥스를 운영하는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는 180억달러를 투자해 사업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5~10년 뒤에는 7개 정도의 OTT 플랫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라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채펙 CEO는 임직원에게 메타버스(3차원 가상공간)를 미래 먹거리로 제시했다. 지난달에는 스토리텔러, 창작자, 기획자, 기술자 등 25명의 리더를 모아 메타버스 사업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채펙 CEO는 “PC와 모바일에 이어 메타버스가 디지털 혁명의 물결을 일으킬 것”이라며 “디즈니 스토리텔링 역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메타버스를 통해 디즈니의 다양한 공간과 사업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방침이다. 채펙 CEO는 “디즈니의 작은 왕국들을 유연하게 연결해 개방할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는 디즈니+뿐만 아니라 디즈니 메타버스를 만드는 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들 꿈꾸게 한 ‘28년차 디즈니맨’

채펙 CEO는 1960년 미국 인디애나주 북서부에 있는 공업도시 해먼드에서 태어났다. 1981년 인디애나대 블루밍턴 캠퍼스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미시간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글로벌 식품회사 하인즈(현 크래프트하인즈)와 마케팅회사 제이원터톰슨 등을 거쳐 1993년 디즈니에 입사했다. 디즈니에서는 배급 부문 사장, 소비자제품 부문 사장, 테마파크 부문 회장 등을 맡았다. 채펙 CEO는 “그동안 다양한 직책을 맡으면서 디즈니의 창의성을 지켜봤다”며 “사람들이 앞으로도 디즈니를 통해 열광하고 꿈을 꾸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