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따라하기에 관하여
얼마 전 SNS에 글을 한 편 썼다. 신간을 홍보하는 글이었다. 요즘은 무작정 좋은 책이라고 홍보성 글을 쓰면 외려 사람들의 비호감을 산다. 그래서 나름 전략적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번에 내가 쓴 방식은 평생 들었던 귀신 이야기를 전부 모아서 홍보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실제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훅 끌려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댓글에서 누구누구의 글과 닮았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이 좀 있었다. 억울했다. 의도적으로 따라 하려고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수긍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대중의 호감을 사는 그의 글을 따라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자 능력이다. 가장 오래된 학습의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들은 좋은 것만 모방하지는 않는다. 어릴 때 눈을 깜빡이는 버릇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나는 재미 삼아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40년이 지난 요즘도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불안증을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집중해서 얘기할 때 심하게 깜빡거리기 때문이다.

눈 깜빡이는 버릇을 제외한다면 모방은 나를 여러모로 개선시켰다. 팝송의 영어 가사를 뜻도 모르고 발음 나는 대로 따라 하면서 노래를 많이 익혔고, 장편소설을 대학노트에 베껴 쓰면서 문체를 배웠다. 주변에 사투리를 쓰는 친구가 있으면 그걸 은연중에 따라 하면서 팔도사투리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하기에 따라 모방은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따라하기 본능이 자신의 생각을 굳히고 넓히는 데 역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분명한 역작용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주관을 가지고 선명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을 두고 갈등하는 편이 인생을 살아가는 더 좋은 방식이라는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모방 능력은 떨어진다. 특히 글쓰기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나는 변화하는 글쓰기를 따라가기가 갈수록 버겁다. 항상 윗세대의 글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모방은 상류와 하류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기존의 미학으로는 낙제점을 받는 글일지라도 사람들의 입과 마음에 오르내리는 글에는 변화된 미학적 감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과 자주 접하고 내 것으로 수용하는 게 결국은 살아남기에 유리하다.

젊은 편집자들이 나이 든 저자들의 글을 교정볼 때 과도하게 고치는 경우가 많다. 윗세대 편집자들은 대부분 이것을 견문의 짧음과 협소한 미학적 훈련 탓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입장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그렇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낡은 미학은 새로운 미학의 교정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내가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게 좋은 글을 만들어내는 첩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