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은의 생명의학] 의대 교육 개편 서둘러야 한다
해마다 12월 대학 입시 시즌에 입시전문기관이 내놓는 각 대학 합격선 분석표의 최상단은 어김없이 의과대학이 차지한다. 최고의 인재들이 의과대학에 몰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마다 이유와 동기가 있겠지만 의사로서 가질 수 있는 직업적 보람, 사회적 지위, 경제적 안정 등이 일반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직업관이 변천하고 경제 발전과 함께 산업 구조의 변혁이 일어나면서, 또 정부 의료 정책 변화에 따라 의사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지만 의대 선호 현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국내 의과대학은 이들 인재에게 어떤 교육을 하고 있을까. 국내 대부분의 의대가 지향하는 1차적인 교육 목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유능한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교과과정도 질병을 진단·치료하는 임상의사 배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교과과정이 의학·의료의 학문적, 기술적 발전과 사회적 역할의 변천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의학·의료는 기초의과학, 자연과학, 공학, 정보통신과학 등과 융합함으로써 건강과 질병에 대한 이해와 질병의 예방·진단·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 왔으며, 그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한편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높아지면서 과학기술, 산업,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등 다양한 비진료 분야에서 의사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늘고 있다.

이제 의과대학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의학의 급속한 발전, 의료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 변화, 의사 전문성의 비진료 영역 수요 증대에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양대 축으로 하는 의대 교육 체계에 의료시스템과학을 주요 교과과정으로 도입해야 한다. 의료시스템과학이란 의료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의 대상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시스템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사회 중심의 의료를 실현하고자 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를 통해 의료의 사회적 가치와 책무, 의료윤리, 보건의료정책, 의료경제학, 의사소통과 팀워크, 리더십 등을 가르쳐야 한다. 아울러 인문사회적 소양을 강화할 수 있는 비교과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임상의사뿐 아니라 진료실 밖에서도 의사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의사를 길러내야 한다. 다양한 비진료 분야에서 의사 전문성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질병을 연구하는 의사인 의사과학자다. 유전체 정밀의료,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맞춤신약 등 혁신 의료기술이 의사과학자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역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224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117명이 의사였으며, 세계 상위 10개 제약기업 최고기술책임자 중 7명이 의사과학자다. 의사과학자가 의학과 의료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26개 의대에서 최근 5년간 배출한 의사과학자는 총 108명에 불과하다. 의대 한 곳에서 1년에 0.8명씩 배출한 셈이다. 미국은 의사 중 3%를 의사과학자로 키우고 있다. 국내 의사과학자가 의사의 1%가 채 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와 의대는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교육체계 구축과 이들이 의학과 의료산업 발전에 주요 플레이어로서 활약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나서야 한다.

기업가 정신 체득 또한 의대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의사들이 혁신·도전·사회적 책임으로 무장해 의약품, 의료기기, 의료·건강서비스 등 바이오헬스산업 분야에 뛰어들도록 자극해야 한다. 서울대 의대에서는 2019년부터 혁신, 기업가 정신, 시장가치 창출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과 정밀의료, 팬데믹의 격랑 속에서 의학·의료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이제 의대 교육을 혁신적으로 개편해 최고의 전문성과 함께 전문가 정신과 혁신 의지를 갖춘 의사, 질병과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을 고치는 의사를 길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