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레오폴드 미술관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레오폴드 미술관
일그러진 얼굴, 비틀린 몸. 거칠고 어두운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누구의 그림인지 눈치챈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입니다.

실레는 28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무려 5000여 점에 달하는 그림을 남겼는데요. 대부분은 자신을 포함해 불안하고 비틀린 청춘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들입니다. 또 관능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실레의 그림은 인기가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MZ세대(밀레니얼+Z세대)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죠. "빈에 클림트 작품을 보러 갔다가 실레에 반해 돌아온다"라는 얘기들이 나올 정도입니다.

실제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신보다 28살이나 어렸던 실레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고 제자로 삼았습니다. 실레가 그림을 교환하길 원하자 클림트는 실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왜 굳이 그림을 바꾸려고 하지? 당신 그림이 더 나은데.”
관능에 담긴 비틀린 청춘의 초상, 에곤 실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실레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강렬한 마성을 가진 실레의 작품 세계와 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실레의 그림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에곤 실레: 욕망이 그린 그림'도 격정적인 그의 인생을 담고 있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강변 툴른에서 태어난 실레의 유년 시절은 꽤 유복했습니다.

그는 특히 툴른역의 역장이었던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던 실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차, 철로 등을 자주 그리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실레가 그림 그리는 걸 매우 싫어해 스케치북을 찢어버리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실레는 아버지를 끝까지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병과 죽음이 실레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성병인 매독을 앓고 있었습니다. 점점 증상이 심해져 직장까지 잃었죠. 심지어 정신착란으로 모든 재산 증서와 주식 서류 등을 난로에 넣고 태워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아버지의 이런 어이없는 기행으로 인해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실레가 15살이 되던 190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후의 실레의 삶과 작품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레는 좋아하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에게 냉담하게 대했던 어머니는 평생 원망하며 증오했을 정도죠.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뇌리엔 성(性)에 대한 강박과 불안이 자리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저 트라우마로만 남진 않았습니다. 실레는 성과 신체에 대해 끊임없이 천착하며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한 쌍의 연인', 1914, 레오폴드 미술관
'한 쌍의 연인', 1914, 레오폴드 미술관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인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명문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실레와 정형화된 기법을 강조하는 아카데미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레는 3년 만에 자퇴를 했습니다.

실레는 자퇴 전부터 아카데미 밖에서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그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1907년엔 클림트와 만나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됐죠. 실레는 아카데미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그림을 그리는 클림트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클림트도 이에 화답하듯 실레의 스승이 되어 다양한 조언을 해줬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 중 한 명이었던 발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발리는 실레의 전속 모델이자 뮤즈가 되었습니다.

실레는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예술가들과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그룹의 선언서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신예술가는 과거와 미래의 산물 없이도 혼자 직접 기초부터 쌓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야 신예술가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새롭고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실레가 인간의 육체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들과 드로잉을 연습하면서였습니다. 실레는 단순히 누드화를 그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 심연에 자리한 은밀한 본능을 파고들려 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 모델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고 비틀리고 거칠게 표현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등을 뒤로 기댄 여인', 1915, 알베르티나 미술관
'등을 뒤로 기댄 여인', 1915, 알베르티나 미술관
하지만 성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실레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실레는 결국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빈에서 떠나 시골 노이렝바흐로 갔는데요. 이곳에서 더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그림에 대한 나쁜 소문들은 금세 퍼졌습니다. 게다가 그곳 가출 청소년들이 실레의 집을 아지트 삼으면서 큰 문제가 됐죠.

급기야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성년자 유괴와 풍기문란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실레는 미성년자 유괴 혐의에선 벗어났지만, 풍기문란으로 24일간 구류됐습니다. 그림 수백 장도 몰수 당했죠.

그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10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이를 통해 굴곡진 삶과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생채기 난 마음을 스스로 달랜 것이 아닐까요.

다행히 실레는 이후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단독 전시회 등을 잇달아 열었고 호평도 받았습니다. 결혼을 해 가정도 꾸렸습니다.

'죽음과 소녀', 1915, 오스트리아 미술관
'죽음과 소녀', 1915, 오스트리아 미술관
하지만 다시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내의 뒤를 이어 죽음에 이르게 됐는데요. 실레의 아내는 오랜 연인이었던 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발리를 버리고 부유한 집안의 딸인 에디트와 결혼했습니다.

실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는 1915년 발리를 그린 마지막 작품입니다. 발리는 자신을 떠나버린 실레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종군 간호사를 자원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1917년 갑작스레 성홍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전에 실레가 그린 '죽음과 소녀'는 마치 발리의 죽음을 예견한 듯해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1918년엔 실레의 아내가 된 에디트도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임신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실레도 사흘 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실레의 손엔 그 사흘 동안 아내를 그렸던 연필과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비틀린 청춘의 초상, 그 자체였던 실레의 삶. 그럼에도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건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 아니었을까요. 실레는 말했습니다.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린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