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인사전문가→명품社 수장…샤넬의 새 얼굴 된 '유리천장 파괴자'
“샤넬이 아웃사이더를 선택했다!”

프랑스 명품기업 샤넬이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로 리나 나이르를 낙점하자 세계 패션업계가 술렁였다. 다국적 소비재기업 유니레버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인사 전문가로 활약해온 나이르와 샤넬의 조합이 의외라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명품을 비롯한 패션업계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나이르를 두고 ‘완전한 아웃사이더’란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나이르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록을 써온 여성 CEO로 꼽힌다. 유니레버에서 일하는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유리천장을 깨왔다. 이 때문에 그는 유리천장의 연쇄 파괴자로 불리기도 한다. 나이르의 샤넬 합류도 새로운 기록이다. 비(非)백인 최초로 샤넬의 사령탑을 맡았다.

샤넬에서도 유리천장 깨

나이르는 1969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콜라푸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작았기 때문에 소녀들이 다닐 학교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유년 시절에 대해 “소녀들에게는 늘 규범과 금기가 적용됐고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나이르는 인도 왈찬드대에 진학해 전자공학과 통신공학을 전공했다. 이어 인도 XLRI경영대학원(MBA)에서 인사를 전공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

나이르는 1992년 유니레버의 인도 자회사인 힌두스탄유니레버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수차례 ‘최초’ 기록을 썼다. 힌두스탄유니레버 공장에서 근무하며 야근을 하는 최초의 여직원 중 한 명이 됐다. 당시 힌두스탄유니레버의 여성 직원 비율은 2%에 불과했기 때문에 여성 화장실이 없는 공장이 대다수였다. 그는 “내가 현장에 투입되면 가장 먼저 여성 화장실부터 생겨야 했다”며 “여성 화장실은 곧 리나의 화장실이라는 농담도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경험을 발판으로 나이르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힌두스탄유니레버의 최연소 임원이 됐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경영진에 합류했다. 그의 전공인 인사 업무에서 능력을 발휘한 것은 물론 경영 감각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르는 유니레버 영국 본사로 이동했고 2016년 최고인사책임자(CHRO)에 올랐다. 세계 190여 개국에서 일하는 유니레버 임직원 15만 명의 인사를 총괄하는 자리다. 아시아인, 그리고 여성이 유니레버의 CHRO를 맡은 건 나이르가 최초였다. 역대 CHRO 중 최연소 기록도 세웠다. CHRO로서 나이르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여러 인사 프로그램을 주도했다. 성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차별 금지에 나섰고 코로나19 사태 때는 유연근무제 등 환경 변화에 맞춰 새로운 실험에 도전하기도 했다.

30년 가까이 유니레버에서만 일한 나이르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내년 1월부터 샤넬의 글로벌 CEO로서 업무를 시작한다. 유색인종으로는 최초로 샤넬 글로벌 CEO에 취임하는 기록도 썼다. 글로벌 기업 사령탑에 오른 인도계 여성으로는 인드라 누이 전 펩시코 CEO에 이어 두 번째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순다르 피차이 CEO,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 등 인도계 경영자들이 미국 실리콘밸리를 장악한 데 이어 명품업계에도 인도계가 가세하게 됐다.

샤넬이 나이르 발탁한 속내는

샤넬은 나이르를 글로벌 CEO로 발탁한 이유를 “장기적인 브랜드 성공을 위해서”라고 발표했다. 회계법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을 기준으로 샤넬은 세계 6위 명품기업이다. 비상장 기업인 샤넬은 코로나19 여파로 작년 매출이 전년보다 17.6% 줄어든 101억달러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는 주요 제품의 가격 인상 효과에 힘입어 매출이 증가세로 돌아섰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국 금융회사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 애널리스트는 “샤넬이 고객만족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제품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컨설팅회사 베인앤드컴퍼니는 명품업계 매출이 올해 3200억달러에서 2025년에는 4180억달러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코로나19 이후 명품업계에서 샤넬의 영향력 확대가 나이르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명품기업들이 CEO를 선택해온 관행을 감안할 때 샤넬의 이번 선택은 매우 독특하다는 시각이 많다. 세계적인 명품기업 상당수는 창업자 일가 또는 내부 인사를 CEO로 택하는 폐쇄적인 인사 관행을 보여왔다. 나이르의 샤넬 합류를 두고 “인도 출신 아웃사이더가 전통 명품기업에 입성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산업 전체로 넓혀봐도 나이르 같은 인사 전문가가 재무·마케팅 전문가를 제치고 CEO를 맡는 사례는 드문 편이다.

샤넬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첫 행보로 다양성과 포용을 상징하는 나이르를 글로벌 CEO로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대의 앤드루 그로브스 교수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샤넬은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하며 화석화된 유물이 돼가고 있었다”며 “하지만 샤넬은 더 포용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원하고 있으며 이는 패션업계에 중대한 변화”라고 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