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영 "'대반전' 이뤘던 올해, 내년엔 '꾸준함' 보여드릴게요"
"시즌이 끝나면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튀김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겠다." 너무나 소박한 꿈이지만 '골프여제' 고진영에게는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27일 화상으로 기자들과 만난 고진영은 "너무 바빠서 감자튀김을 먹으며 누워있을 시간이 없었다"며 "'슬기로운 의사생활2'를 끝까지 다본 것이 유일한 소득"이라며 웃었다.

고진영은 올해 그 누구보다 역동적인 시간을 보냈다. 시즌 초 짧은 슬럼프를 겪었지만 하반기에 다시 기세를 올리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5승을 따냈다. 시즌 최종전 CME챔피언십 우승으로 올해의 선수상, 상금왕까지 싹쓸이했다.

그는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순간이 가장 짜릿했다"며 올 시즌의 키워드로 '대반전'을 꼽았다. 올 시즌 초, 고진영은 ‘우승을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정도로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다. 특히 지난 3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7월 발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에서 시즌 첫 승을 올리며 반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라이벌 넬리 코다(23·미국)에게 금메달을 내준 그는 국내에서 절치부심하며 집중적 훈련에 들어갔다. 스윙 코치와 클럽, 퍼터 등 모든 것을 바꾸고 주니어 때처럼 연습했다. 스스로 “올림픽 이후 한 달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연습했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답답하고 골프가 싫어지고 정체성이 혼란이 올 정도로 힘든 시간이 있었지면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석달만에 잘 극복했죠. 골프가 혼자하는 운동이 아니란걸, 주변을 잘 챙겨야 하다는 걸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사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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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부진에 빠지며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세계랭킹 1위 자리를 코다에게 내어주기도 했다. 하반기 몰아치기로 개인상을 모두 가져오긴 했지만 랭킹 1위 자리는 여전히 뺏지 못한 상태다. 점수는 단 0.23포인트 차이. 시즌 최종전까지 개인상 부문을 두고 치열한 승부를 펼친 두 선수의 라이벌전은 올해 LPGA 투어가 선정한 최고의 뉴스가 되기도 했다.

앞서 코다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진영에 대해 "티샷부터 퍼팅까지 완벽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고진영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넬리가 먼저 해버렸다"며 웃었다. "넬리는 멀리 똑바로, 다양한 샷을 구사하는 선수예요. 2019년부터 거의 2주에 한번 꼴로 같이 경기를 했는데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친분이 있어요. 매너가 좋고,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선수입니다."

올해 다양한 성취를 이룬 그이지만, 여전히 우승컵을 더 들어올리고 싶다고 했다. 고진영은 "대회 출전 자체가 저에게는 동기부여가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친구, 반려견,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포기하고 미국에 온 이상 아쉬운 만큼 대회에 집중하려고 한다"는 설명이다.

LPGA 투어에서 톱랭커로 활약하고 있는 그를 롤모델로 꼽는 후배들이 많다. 고진영은 "언제부터인가 제 말과 행동이 어린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 조심하게 됐다"고 텉어놨다. 내년에 새롭게 미국무대에 진출하는 후배들에게 줄 조언에 대해서도 "제가 그럴 입장은 아니다"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한국에서는 일요일에 대회가 끝나면 월.화요일에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바로 다음 대회를 위해 비행기로 이동해야 한다. 골프만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지만 동시에 개인생활을 포기하고 골프만 해야하는 곳"이라며 정신적 대비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고진영은 다음달 12일 미국으로 떠나 다음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에 돌입한다. '대반전'의 한해를 보낸 그는 내년엔 '꾸준함'을 선보이는게 목표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골프를 최대한 재밌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골퍼 고진영 뿐 아니라 사람 고진영으로서도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