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기로에 선 한국 민주주의
2022년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코로나 팬데믹도 어느덧 3년째다. 작년 초 신속한 백신 개발과 접종이 시작되면서 코로나 팬데믹을 통제할 수 있으라는 기대는 작년 말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앞으로 2년, 어쩌면 5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관측이 이어지고 있다. 팬데믹과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으로 옮겨 왔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이 위태로운 세상이 됐다.

이제 겸허히 인정하자.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팬데믹을 장악하지 못했다. 보통 10년 걸린다는 백신 개발을 1년 만에 달성할 만큼 과학은 대단하지만, 최초로 시도되는 백신의 단기적 부작용과 장기적 리스크에 대해서는 어느 과학자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백신으로 팬데믹을 완벽하게 종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과학이 인정한 이상, 팬데믹을 방어하는 것은 정책의 영역이다. 정책은 선택의 문제로 압축된다. 공동체에 바람직한 선택과 개인에게 바람직한 선택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진원지인 중국에서는 철저한 지역봉쇄로 개인의 삶, 경제활동이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경제적 생명의 안전보다는 물리적 생명의 안전이 압도했다. 감염자 발견에 대한 문책이 뒤따르는 체제에서 부정적인 뉴스는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부정적인 소문은 괴담으로 치부된다. ‘위드 코로나’로 전환한 미국과 유럽은 백신 접종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혼용한다. 물리적인 생명과 경제적인 생명 사이의 균형을 취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오미크론 변이의 광범위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란 이름으로 국가정책을 강요하면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권위주의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그들의 시위에서 개인의 자유만을 내세우는 서구민주주의의 몰락을 읽어내겠지만,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오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 그 시위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 국민적 동의 없이 군림하려는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팬데믹 3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백신 개발 이후 정부 정책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졌지만, 정책 결정과 소통의 방식에서 투쟁으로 획득하고 쌓아 올렸던 공동체 민주주의는 무시됐다. 급속 개발된 백신 접종의 부작용 때문에 다른 국가들의 부작용 사례를 파악한 뒤 도입하는 것이 현명하다던 궤변으로 일관하던 당국. 그러다 별안간 전 국민적인 백신 접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책 전환에 대한 어떤 제대로 된 변명도 사과도 설명도 없이. 백신 접종만이 선이고, 미접종은 악인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백신으로 인한 치명적인 결과들이 주변에서 발견되고 접종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방역당국은 “접종으로 인한 이득이 더 크다”고 얼버무리기 급급했다. 백신 접종의 사회적 이득이 손실보다 크다고 우기는 것은 민주화 세대가 거부했던 권위주의 국가의 모습이다.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려면 측정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 측정의 근거를 밝혀야 하지 않을까. 측정에 이용된 정보 제공은 민주주의 국가의 책무 아닐까.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미리 밝힌다. 필자는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부스터샷을 슬그머니 3차 접종이란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2차 접종 후 부스터샷까지의 적정 시한을 합리적 설득 없이 앞당기는 초유의 대국민실험을 감행하는 것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생소한 모습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백신의 치명적인 부작용 사례들을 정확한 정보 제공 없이 싸잡아 가짜뉴스, 괴담으로 치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반대 촛불시위가 광화문을 뒤덮고, 광우병 미국 소고기에 대한 그야말로 괴담과 가짜뉴스가 인터넷을 도배할 때, 정부 당국은 범정부조직을 가동해 가짜뉴스들을 하나하나 적시하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규명하는 데 안간힘을 다했다.

괴담으로 치부한다고 국민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카카오,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무장된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뿐이다. 앞으로 두 달 후, 한국의 대선은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킬 것이다. 현재 유력 후보들의 말과 태도를 볼 때, 퇴행하는 민주주의를 복원할 수 있을지 지극히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