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태풍에 대패로 끝난 쿠빌라이칸의 일본 정벌…동원된 고려에선 친원파 득세하며 몽골풍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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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여몽연합군의 일본열도 공격 (下)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갖춘 원나라와 고려의 대규모 연합군은 변방의 섬나라 일본 원정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하고 퇴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패인을 ‘바람(神風)’ 탓으로 몰고, 아쉬워하는 평가까지 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아는 확실한 방법은 실질적인 주체인 원나라의 정책을 살피는 것이다.
첫째는 세계 제국 완성이라는 원나라의 정책과 쿠빌라이칸의 개인적인 야망이다. 칭기즈칸의 뜻을 실천한 2대 오고타이칸은 실제로 유럽 정복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4대 칸인 쿠빌라이에게 이 과업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그는 1270년에 몽골의 원향인 동방에서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고, 1273년에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44년 만인 1279년에 멸망시켰다. 무인들이 지배하는 바다 건너 소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치가 작았다. 또 은, 면, 수은 등의 물품들이 있다 해도 경제적인 가치는 낮았다. 그런데도 쿠빌라이칸은 왜 대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 어려운 해양전을 감수하면서 일본 열도를 공격했을까.
둘째는 고려를 장악하는 원나라 정책의 문제다. 원나라가 추진한 고려 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전략적인 가치가 약하고, 우선 과제가 아닌 고려와의 전면전을 연기하면서 강도정부를 존속시킨 일이다. 2단계는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을 조직해 일본을 공격한 일이다. 고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치 않은 전쟁에 동원됐지만 패배로 말미암아 많은 병력이 희생됐고, 수많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국토는 황폐해졌을 것이다.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 경제력도 소진됐다.
고려는 2차 원정에 참전할 능력이 없음을 호소했으나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차 또한 태풍으로 인해 연합군은 대패했다. 그나마 다행히 고려인들은 많이 생존했으나, 동로군에 편입된 북방계 종족들은 일부만이 귀환했을 뿐이다. 3500여 척을 갖고 참전했던 만군(남송군) 10만여 명은 선박들과 함께 완벽하게 전멸했다. 원나라와 쿠빌라이칸은 원정에 실패했지만, 자체 전력에는 별로 손실이 없었고 정치적, 특히 대고려 정책을 추진하는 데 수확이 많았다고 풀이된다.
3단계는 고려의 실질적인 지배와 친원파의 양성이다. 원나라는 이미 1258년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1270년에는 동녕부까지 설치해 현재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을 빼앗았다. 또 1차 정벌 전인 1273년 제주도에 다루가치를 파견해 목마장을 만들었다. 1280년에는 2차 정벌을 명분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한 뒤 해체하지 않은 채 무려 76년 동안 고려의 정치 구조에 간섭했다. 이로써 고려는 친원파와 권문세족들이 발호하면서 자주성이 약화했고, 사회는 역동성과 자의식이 약해지면서 몽골풍들이 만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위력, 특히 해양력이 약화해 한때는 강도정부의 해안까지 공격했던 왜구가 대규모로 공격하자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고려 멸망에 직접적인 요인이 됐다.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은 자부심은 얼마나 커졌을까. 그들은 두 번의 폭풍을 ‘가미카제(신풍)’라고 부르면서, 일본을 ‘신국’이라는 자존감을 또 한 번 확신했다.
그 의식이 그 후 우리 민족에게 700년 이상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실질적인 패배자가 고려라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첫째는 세계 제국 완성이라는 원나라의 정책과 쿠빌라이칸의 개인적인 야망이다. 칭기즈칸의 뜻을 실천한 2대 오고타이칸은 실제로 유럽 정복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4대 칸인 쿠빌라이에게 이 과업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그는 1270년에 몽골의 원향인 동방에서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고, 1273년에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44년 만인 1279년에 멸망시켰다. 무인들이 지배하는 바다 건너 소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치가 작았다. 또 은, 면, 수은 등의 물품들이 있다 해도 경제적인 가치는 낮았다. 그런데도 쿠빌라이칸은 왜 대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 어려운 해양전을 감수하면서 일본 열도를 공격했을까.
둘째는 고려를 장악하는 원나라 정책의 문제다. 원나라가 추진한 고려 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전략적인 가치가 약하고, 우선 과제가 아닌 고려와의 전면전을 연기하면서 강도정부를 존속시킨 일이다. 2단계는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을 조직해 일본을 공격한 일이다. 고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치 않은 전쟁에 동원됐지만 패배로 말미암아 많은 병력이 희생됐고, 수많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국토는 황폐해졌을 것이다.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 경제력도 소진됐다.
고려는 2차 원정에 참전할 능력이 없음을 호소했으나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차 또한 태풍으로 인해 연합군은 대패했다. 그나마 다행히 고려인들은 많이 생존했으나, 동로군에 편입된 북방계 종족들은 일부만이 귀환했을 뿐이다. 3500여 척을 갖고 참전했던 만군(남송군) 10만여 명은 선박들과 함께 완벽하게 전멸했다. 원나라와 쿠빌라이칸은 원정에 실패했지만, 자체 전력에는 별로 손실이 없었고 정치적, 특히 대고려 정책을 추진하는 데 수확이 많았다고 풀이된다.
3단계는 고려의 실질적인 지배와 친원파의 양성이다. 원나라는 이미 1258년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1270년에는 동녕부까지 설치해 현재 평안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을 빼앗았다. 또 1차 정벌 전인 1273년 제주도에 다루가치를 파견해 목마장을 만들었다. 1280년에는 2차 정벌을 명분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한 뒤 해체하지 않은 채 무려 76년 동안 고려의 정치 구조에 간섭했다. 이로써 고려는 친원파와 권문세족들이 발호하면서 자주성이 약화했고, 사회는 역동성과 자의식이 약해지면서 몽골풍들이 만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위력, 특히 해양력이 약화해 한때는 강도정부의 해안까지 공격했던 왜구가 대규모로 공격하자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고려 멸망에 직접적인 요인이 됐다.
일본의 대응과 승리
승전국인 일본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의 국제 관계나 원나라의 내부 사정을 고려하면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는데, 일본은 첫 교섭부터 사신단을 몰살시키는 등 현실을 무시한 정책들을 폈다. 물론 일본은 변방의 섬나라이고, 외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나라의 상인들이 혼슈 중부인 쓰루가의 객관에 머물렀을 정도이니, 무역은 물론이고 국제질서 또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일본은 내부 문제로 인해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가마쿠라(겸창) 막부가 천황권을 약화하고, 무사들을 통제하는데 활용하려는 기회로 삼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은 자부심은 얼마나 커졌을까. 그들은 두 번의 폭풍을 ‘가미카제(신풍)’라고 부르면서, 일본을 ‘신국’이라는 자존감을 또 한 번 확신했다.
그 의식이 그 후 우리 민족에게 700년 이상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실질적인 패배자가 고려라는 사실은 명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