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상응조치 없자 불만 커진듯…대미 압박수위 높여·대선 앞둔 南에도 경고
전문가 "SLBM→중거리→장거리→핵실험 수순 갈수도"…실제 행동여부에 주목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가능성 카드를 꺼내는 등 '벼랑 끝 전술'을 펼치면서 한반도 정세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앞으로 북한의 행동 수위에 따라 북미 관계가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전으로 회귀하고, 문재인 정권이 집권 내내 공들였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상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북한, ICBM·핵실험 카드 '만지작'…文정부 대북정책 물거품되나
북한은 전날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주재로 정치국 회의를 열어 한반도 주변 정세와 일련의 국제문제들에 대한 분석 보고와 함께 향후 미국에 대한 대응 방향을 토의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대미 대응 방향과 관련, "우리가 선결적으로, 주동적으로 취했던 신뢰 구축 조치들을 전면 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들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신속히 검토해볼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이는 북한이 지난 2018년 4월 핵실험·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을 선언했던 것을 3년 9개월여 만에 철회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남북미 대화가 급물살을 타던 2018년 4월 20일 당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주재로 열린 당 전원회의를 통해 "4월 21일부터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켓 시험발사를 중지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한 바 있다.

이후 북미 간 '하노이 노딜'과 '스톡홀름 노딜' 등으로 양국 관계가 순탄치 않았음에도 모라토리엄을 깨지 않고 유지해왔다.

이 모라토리엄은 '북미간 신뢰'를 상징하고 유지하는 최후 수단이나 마찬가지여서 북한도 최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 한 것이다.

북한은 2019년 10월 스톡홀름 협상이 결렬되자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를 통해 "우리의 핵시험과 ICBM 시험발사 중지가 계속 유지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되살리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 입장에 달려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같은 맥락이었다.
북한, ICBM·핵실험 카드 '만지작'…文정부 대북정책 물거품되나
그러나 북한이 전날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모라토리엄 철회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자신들의 그간 신뢰 조치에 미국이 상응하는 조처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북한은 미국에 대해 '대화 상대의 선의'라거나 '아무런 대가도 없이 미국 대통령이 자랑할 거리를 안겨줬다'는 등의 언급을 통해 이런 불만을 표출해왔다.

북한이 이번 정치국 회의에서 "싱가포르 조미 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조선반도 정세 완화의 대국면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인 성의 있는 노력"이라고 언급한 것도 북한의 이런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

북한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란 핵 합의 복원 협상 등 외교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놓인 시점을 택해 압박 수위를 끌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들 두 현안 해결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핵실험과 ICBM 발사 재개 등을 저지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리게 됐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념 신년 기자회견이 열린 시점에 발표한 것에서도 북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북한 문제가 뒷순위로 밀리는 인상을 받으면서 주목도를 끌어올리고자 모라토리엄 철회 가능성 카드를 활용했다고 분석한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북한의 순위가 계속 밀리는 것에 대한 조바심이 있고, 우크라이나 사태 전개에 따라 북미 관계가 실종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울러 내달 베이징 동계올림픽과 3월 남한 대선을 앞둔 시점에 전방위적으로 압박의 메시지를 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에 대해 압박 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남측에 대해서도 미국을 설득해 자신들이 취해왔던 신뢰 조치에 상응하는 행동이 나오도록 나서달라는 압박을 가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번 정치국 회의에서 남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그 내면에는 남측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새로 들어서는 정부에서도 남북관계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 ICBM·핵실험 카드 '만지작'…文정부 대북정책 물거품되나
북한이 앞으로 모라토리엄 철회를 공식 선언하고 핵실험과 ICBM 발사 재개 등의 실제 행동화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모라토리엄 검토에서 결정으로 이어지면 빠르면 2월 16일 전후, 늦어도 4월 15일 전후에 실제 행동이 예측된다"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중거리 탄도미사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핵실험 순으로 점점 강도를 넓혀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은 2017년 11월 29일 ICBM '화성-15형'을 발사하고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이후 ICBM 발사는 없었다.

다만, 2020년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다탄두(MIRV) 형상의 신형 ICBM을 공개한 바 있다.

11축 22륜(바퀴 22개) 이동식 발사차량에 실린 신형 ICBM은 길이가 23~24m가량으로 세계에서 길이가 가장 긴 '괴물 ICBM'으로 평가됐다.

만약 재개한다면 이 괴물 ICBM을 시험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지만, 북한이 복구공사를 한다면 2~3개월 이내에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군 당국은 추정한다.

실제로 북한이 ICBM을 발사하거나 핵실험에 나서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도 공동 대응에 나서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이 경우 문재인 정부가 지난 5년간 펼친 대북정책이 임기 말에 사실상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한반도 정세는 2017년 수준의 '전운'이 감돌 수도 있다.

북한의 모라토리엄 준수와 상황 관리는 남북미 관계가 얼어붙은 뒤에도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의 성과물로 꾸준히 언급했던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모라토리엄' 또는 '모라토리엄 철회' 등의 직접적인 문구를 사용하지 않고 '재가동 검토'라는 표현을 동원했고, 핵과 미사일 용어 대신 '강력한 물리적 수단'이라 한 것 등으로 미뤄 수위를 일부 조절했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여기에다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가중된 경제난 등의 상황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려 민심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은 '말 폭탄'으로 압박 수위를 높여나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