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호성 고려대 교수. 사진=허문찬 기자
남호성 고려대 교수. 사진=허문찬 기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에는 ‘영어음성학’이라는 강좌가 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이 강좌에서 첫 수업부터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수학’과 ‘코딩’. 인간의 음성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프로그램을 이용해 음성을 합성해보는 것이 이 수업의 목표다. 직관적인 그래프·도형을 이용한 설명으로 수학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문과 학생들도 이 강좌를 마치고 나면 어느새 자연계열 수준의 수학 기초를 갖추게 돼 ‘마법의 강좌’로 소문이 자자하다.

이 별난 과목의 수업을 맡은 ‘괴짜 교수’가 바로 남호성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세계적 음성학 연구소로 꼽히는 미국 예일대 헤스킨스연구소 출신인 그는 2014년 고려대에 부임해 ‘융합형 인재’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차량용 음성인식 솔루션 회사인 미디어젠과 협력해 상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 그는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일반 대중을 위한 자기계발서인 《수학을 읽어드립니다》를 펴냈다.

스스로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들을 위해 나섰다”고 말하는 남 교수. 어쩌다 영문과 교수가 영어 수업에서 수학과 코딩을 가르치게 된 것일까. 남 교수는 “저 역시 고교 때는 수학을 두려워한 ‘수포자’였지만 결국 극복해냈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수학과 코딩이 중요해진 만큼 겁먹지 않고 수학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 동소문동 연구소에서 남 교수를 만났다.

○‘수포자’에서 수학 전도사로

사진 = 허문찬 기자
사진 = 허문찬 기자
지금은 문과생들에게 공학 수학도 가르치는 남 교수지만 그는 고교 시절 수학의 벽에 부딪혀 수학 공부를 포기한 학생이었다. 수학경시대회에 나갔을 정도로 어렸을 적 수학 공부를 좋아했지만, 수식이 복잡하게 적힌 고교 교과서를 보면서 어느새 자신감이 없어졌고 결국 문과를 택했다.

‘문돌이’로 살아가던 그에게 변화가 온 것은 영문과 대학원생 시절인 1995년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통신(현재 KT)의 자동음성인식 시스템을 만드는 과제에 우연히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을 접했다. 프로그래밍에 매료돼 대학원을 그만두고 1997년 삼성SDS에 입사해 1년반을 다녔다. 이후 회사를 나오고 예일대 헤스킨스연구소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융합 학문’을 공부했다.

“헤스킨스연구소는 음성학 연구소지만 과학·공학·코딩 등 다양한 학문 융합으로 더 유명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음성처리 분야를 연구했는데 상당히 어려운 수학을 다뤄야만 했죠. 손 놓고 있던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려니 정말 엄청나게 어려웠어요. 도움을 구할 길이 없을 땐 블로그를 뒤져가면서 수학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제가 이런 고생을 하면서 수학을 공부하다 보니 ‘학생들은 분명 여기가 어려울 거야’ 하고 바로 알 수 있게 됐죠.”

2014년 그는 헤스킨스연구소에서 배운 내용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자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와 고려대로 이직했다. 교수로 부임한 뒤엔 미디어젠과 협력해 ‘NAMZ(Neural AI research center at MediaZen)’ 연구소를 세웠다.

“NAMZ 연구원들은 문과생이지만 실력은 여느 컴퓨터공학과 학생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오히려 문과 배경을 갖고 있으니 ‘음성학’을 다루는 데선 공대 학생들보다 더 월등하죠. 이런 시너지가 문과 학생들이 ‘융합 교육’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수학 다 안 배워도 됩니다”

남 교수가 수업에서 중점적으로 사용하는 수학은 고교 과정 중에서도 비교적 난도가 높은 ‘선형대수학’과 ‘행렬’이다. 인간의 음성을 데이터로 변환해 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두 과목은 필수다.

선형대수학은 이과 학생들에겐 필수적인 과목이지만 문과생들은 고교 과정에서 접하지 않는 만큼 낯설 수밖에 없다. 기초부터 가르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남 교수는 웃으며 그가 강좌에 사용하는 수업자료들을 보여줬다. 선형대수학과 행렬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지만 10분가량의 수업 내용 중 수식이 등장한 것은 많아야 서너 번. 그마저 기초적인 1차 방정식이 대부분이었다.

“일반적인 수학 수업에서 100을 가르친다면 실제 데이터 분석과 변환에서 필요한 수학은 많아야 3~5 정도입니다. 학교에서 ‘수포자’가 나오는 이유도 100을 모두 이해시키려고 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좋아하고,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서 쓸 수 있는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면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남 교수는 “프랑스의 ‘에콜 42’처럼 학생들이 코딩·수학·공학 등 다양한 학문을 주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미니학교’를 세워보는 게 꿈”이라며 “앞으로 ‘문송’하다는 말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