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빛과 긴 어둠, 그리고 영원한 영광···렘브란트[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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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가족, 친구, 동료들과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하시나요. 과거엔 포즈가 대체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렬로 쭉 서서 동일한 자세를 한 채 다소 어색하게 찍었죠.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각양각색으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비해 더 재밌고 생생한 단체 사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도 이런 변화로 열풍을 일으켰던 인물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실까요. 이 작품은 외과 의사들의 주문을 받고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의사들을 줄 세워 놓고 그리지 않았습니다. 해부학 수업을 듣는 의사들의 모습을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담아냈죠. 이 작품으로 렘브란트는 단숨에 이름을 알리게 됐습니다. 그의 대표작 '야경'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경'도 암스테르담 민병대의 의뢰를 받아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에도 역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단체 초상화라기 보다 민병대가 출격하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죠.
게다가 그는 작품들에 또 다른 마법을 하나 더했는데요.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활용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공연에서 무대 위 특정 인물과 사물을 유독 밝게 비추듯 그림에도 이런 기법을 접목한 겁니다.
빛과 어둠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마법으로 '빛의 마술사'라고도 불렸던 렘브란트. 그의 인생은 작품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빛과 어둠 모두를 품고 있는 그림들이 곧 렘브란트였으며, 렘브란트 스스로가 곧 작품 자체가 되었죠. 그의 찬란했던 빛의 마법 속으로 함께 떠나 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 미술 인생은 꽤 출발이 좋았습니다.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역사화가 피러트 라스트만의 공방에서 공부하며 다양한 기법도 익혔죠.
그러다 26살에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갑자기 큰 호평을 받으며, 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 화가로 등극했습니다. 이전 초상화들에선 느낄 수 없던 생생함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됐죠.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찾아온 빛은 강렬했지만 너무도 짧았습니다. 이후 길고도 깊은 어둠이 찾아왔죠. 그 어둠은 오늘날 그의 대표작이자 명작으로 꼽히는 '야경' 때문이었습니다.
'야경'은 렘브란트가 36살에 완성했는데요. 이 그림을 그린 후 그는 엄청난 항의에 시달렸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습니다.
빛이 가득한 곳에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크고 얼굴이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어둠에 가려진 인물들은 대체로 작고, 얼굴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누구는 멋있게 그려졌고 누구는 볼품없이 나왔다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은 그의 작품의 생명과도 같았으니까요. 계속되는 수정 요청에도 이렇게 딱 잘라 말했습니다. "미술 작품은 작가가 끝났다고 했을 때 끝난 것이다." 결국 '야경'으로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많던 초상화 문의가 뚝 끊기며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었는데요. 부인과 다섯 아이 중 네 명의 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엔 하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인해 간음죄 혐의도 받았죠.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도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화상으로 그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죠.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작가로 유명한데요.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렘브란트 이전엔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많지 않았습니다. 후원자들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았기 때문에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화가들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이들은 자화상에 예술가로서의 삶과 자긍심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도 그의 인생 자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명성을 얻기 전, 20대에 그린 자화상엔 빛과 어둠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한쪽 볼은 밝고 선명하게 보이지만, 다른 쪽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죠. 왠지 희망과 불안이 함께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 자화상을 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을 포기한 젊은이는 생명 없는 시체와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리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했습니다.
이후 렘브란트가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30대에 그린 자화상에선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껏 차려입고 중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반면 40대 자화상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야경' 이후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60대가 되어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이란 그림을 남겼는데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화가 제욱시스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그린 작품입니다.
제욱시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제욱시스에게 늙고 못생긴 노파가 찾아와 아프로디테처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황당한 요청에도 노파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다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담긴 웃음은 제욱시스의 이 웃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 온갖 모진 풍파를 겪은 자신의 얼굴을 물감 덩이를 짓이겨 거칠게 그려 넣었는데요. 그러면서도 초라하고 늙은 스스로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웃음을 제욱시스의 이야기에 녹여 표현했습니다. 이 미소엔 렘브란트의 인생을 관통한 빛과 어둠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죠.
이처럼 렘브란트의 인생은 찰나의 빛, 그리고 길고 긴 어둠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지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직시했습니다. 그 덕분에 렘브란트는 사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재평가 받고, 오늘날까지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각양각색으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비해 더 재밌고 생생한 단체 사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도 이런 변화로 열풍을 일으켰던 인물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실까요. 이 작품은 외과 의사들의 주문을 받고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의사들을 줄 세워 놓고 그리지 않았습니다. 해부학 수업을 듣는 의사들의 모습을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담아냈죠. 이 작품으로 렘브란트는 단숨에 이름을 알리게 됐습니다. 그의 대표작 '야경'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경'도 암스테르담 민병대의 의뢰를 받아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에도 역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단체 초상화라기 보다 민병대가 출격하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죠.
게다가 그는 작품들에 또 다른 마법을 하나 더했는데요.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활용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공연에서 무대 위 특정 인물과 사물을 유독 밝게 비추듯 그림에도 이런 기법을 접목한 겁니다.
빛과 어둠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마법으로 '빛의 마술사'라고도 불렸던 렘브란트. 그의 인생은 작품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빛과 어둠 모두를 품고 있는 그림들이 곧 렘브란트였으며, 렘브란트 스스로가 곧 작품 자체가 되었죠. 그의 찬란했던 빛의 마법 속으로 함께 떠나 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 미술 인생은 꽤 출발이 좋았습니다.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역사화가 피러트 라스트만의 공방에서 공부하며 다양한 기법도 익혔죠.
그러다 26살에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갑자기 큰 호평을 받으며, 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 화가로 등극했습니다. 이전 초상화들에선 느낄 수 없던 생생함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됐죠.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찾아온 빛은 강렬했지만 너무도 짧았습니다. 이후 길고도 깊은 어둠이 찾아왔죠. 그 어둠은 오늘날 그의 대표작이자 명작으로 꼽히는 '야경' 때문이었습니다.
'야경'은 렘브란트가 36살에 완성했는데요. 이 그림을 그린 후 그는 엄청난 항의에 시달렸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습니다.
빛이 가득한 곳에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크고 얼굴이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어둠에 가려진 인물들은 대체로 작고, 얼굴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누구는 멋있게 그려졌고 누구는 볼품없이 나왔다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은 그의 작품의 생명과도 같았으니까요. 계속되는 수정 요청에도 이렇게 딱 잘라 말했습니다. "미술 작품은 작가가 끝났다고 했을 때 끝난 것이다." 결국 '야경'으로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많던 초상화 문의가 뚝 끊기며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었는데요. 부인과 다섯 아이 중 네 명의 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엔 하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인해 간음죄 혐의도 받았죠.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도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화상으로 그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죠.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작가로 유명한데요.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렘브란트 이전엔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많지 않았습니다. 후원자들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았기 때문에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화가들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이들은 자화상에 예술가로서의 삶과 자긍심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도 그의 인생 자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명성을 얻기 전, 20대에 그린 자화상엔 빛과 어둠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한쪽 볼은 밝고 선명하게 보이지만, 다른 쪽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죠. 왠지 희망과 불안이 함께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 자화상을 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을 포기한 젊은이는 생명 없는 시체와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리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했습니다.
이후 렘브란트가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30대에 그린 자화상에선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껏 차려입고 중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반면 40대 자화상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야경' 이후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60대가 되어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이란 그림을 남겼는데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화가 제욱시스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그린 작품입니다.
제욱시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제욱시스에게 늙고 못생긴 노파가 찾아와 아프로디테처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황당한 요청에도 노파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다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담긴 웃음은 제욱시스의 이 웃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 온갖 모진 풍파를 겪은 자신의 얼굴을 물감 덩이를 짓이겨 거칠게 그려 넣었는데요. 그러면서도 초라하고 늙은 스스로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웃음을 제욱시스의 이야기에 녹여 표현했습니다. 이 미소엔 렘브란트의 인생을 관통한 빛과 어둠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죠.
이처럼 렘브란트의 인생은 찰나의 빛, 그리고 길고 긴 어둠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지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직시했습니다. 그 덕분에 렘브란트는 사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재평가 받고, 오늘날까지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