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과 천연가스(LNG)를 녹색에너지로 분류한 ‘유럽연합(EU) 택소노미(금융 녹색분류체계·Taxonomy)’ 확정은 탄소 감축에 원전 활용이 필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택소노미는 녹색사업과 기술로 투자자금이 흘러가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EU택소노미 안(案) 마련에 회원국 간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EU 의회를 거쳐 내년부터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풍력 불안정으로 에너지 대란을 겪으면서 원전 중요성을 체감한 때문일 것이다.

원전 투자를 다시 늘리는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이런 방향으로 뛰며 경쟁한다. 중국·러시아는 벌써부터 원전 투자를 녹색활동으로 분류했으며, 미국도 원전의 택소노미 포함을 적극 검토 중이다. EU에선 2050년까지 원전에 5000억유로(약 680조원)를 투자해야 한다는 공격적 제언까지 나온다. 그런데도 한국은 작년 말 확정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서 ‘원전 제외, LNG 조건부 포함’ 결정을 내렸다. EU택소노미를 참고할 생각도 없이 작정하고 ‘거꾸로’ 내달린 것이다. K택소노미를 두고 탈(脫)원전 정책의 ‘대못’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탈원전을 고수하면서 2050년 발전부문 탈탄소화를 이루려면 500조원 이상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 지적도 가볍게 무시했다.

K택소노미를 이대로 두면 차세대 원전기술 투자를 위한 금융조달이 어려워진다. 침체된 원전산업은 더욱 위축되고, 탄소중립 목표 근접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원전 수출 경쟁력 추락은 말할 것도 없다. 탈원전 정책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한국 정부의 원전 세일즈는 국제적 웃음거리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수정 없이 1년간 K택소노미를 운영하겠다”는 정부 입장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환경부가 그제 “EU택소노미 안을 검토하고 우리 분류체계에 원전 포함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언제 수정할지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래선 안 된다. 원전 없는 탄소중립은 불가능하다는 게 국제사회의 상식이 된 마당에 언제까지 탈원전을 교리(敎理)처럼 받들 것인가. 여당 대선후보의 감(減)원전 주장도 다를 바 없다. 토론회에서 ‘RE100’(기업 사용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 같은 시사상식을 자랑하기 앞서 세계 조류와 거꾸로 가는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