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블루프린트 정부'의 실패
“블루프린트(blueprint·설계도)가 내려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A씨는 이전 정부와의 차이점을 묻자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과거엔 뼈대만 주고 살은 우리(관료)가 붙였다. 하지만 이 정부에선 구체적인 목표 숫자와 실행 방안까지 담긴 도면이 떨어졌다”고 했다. BH(청와대)가 지시를 내리고 부처가 정책을 만드는 건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달랐던 점은 시장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저돌성에 있었다.

“시장은 생명체다. 청와대가 만든 계획대로 움직일 리가 없지 않겠나.”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다는 자만심에, 시장 오류를 잡겠다는 결기가 더해져서 숱한 정책 참사가 발생했다는 지적이다. 그 과정에서 사기가 떨어진 공무원의 민간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장과의 불화(不和)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내재했다. 여당 대선 후보조차 “매우 잘못된, 부족한 정책”이라고 실토한 부동산 정책이 단적인 예다. 이재명 후보는 대선 토론회에서 집값 폭등의 원인으로 “특히 임대사업자 보호 정책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며 무리한 시장 개입의 실패를 인정했다.

산업정책은 달랐을까. 모든 새로운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고민하는 문제는 “다음 5~10년 동안 먹고살 것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 권력을 쟁취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유일한 다음 목표는 ‘국민의 먹거리를 해결한 정치 지도자’로 남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키웠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세 개만 만들자”는 목표에 맞춰 설정한 타깃이 바이오시밀러와 수소경제, 시스템 반도체다. 이들 산업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성공 가능성이 크면서 정부가 지원할 확실한 명분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설정한 조건은 다섯 가지였다. 첫째, 보유 기술이 세계 톱클래스 수준일 것. 둘째, 기업의 자본 여력이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을 것. 셋째, 글로벌 시장이 상당한 규모의 성숙 단계에 도달해 있을 것. 넷째, 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클 것. 다섯째, 대규모 고용 창출이 수반될 것. 문재인 대통령의 산업 현장 방문도 다섯 가지 ‘테마’에 맞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셀트리온 등이 선택됐다.

중소·중견기업 육성을 공약으로 걸고 중소벤처기업부까지 신설한 이 정부가 대기업을 경제 치적의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30대 그룹의 수출 기여도는 3분의 2에 달하고, 전체 시설 투자의 70% 이상을 담당한다. 지난해 주요 대기업 200여 곳의 직접 경제 기여액이 1300조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훌쩍 넘는 수치다. 그만큼 대기업의 경제 기여도가 압도적이다. 게다가 위기 극복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건 언제나 기업들이었다.

청와대의 3대 산업 육성 프로젝트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백서에 어떻게 기록될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독립과 더불어 차세대 먹거리 육성에 기여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겠지만 세간의 평가는 다를 것이다. 청와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기업 친화적이라고 자평하고 있지만, 경제계 일각에선 전형적인 ‘숟가락 얹기’라는 비판도 있다.

이 정부가 계승했다고 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당시 여권에선 “시장 권력에 투항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경제만큼은 정부 개입보다는 자유 시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앞으로 3개월 후에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백서가 나올 것이다. 적어도 산업정책 분야만큼은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내면 어떨까.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규제들이 기업 활동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어떤 정책 지원보다 중요하다.” 시장과의 반목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블루프린트 정부’의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평가받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