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1943, 베르겔재단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1943, 베르겔재단
"Viva La Vida (비바 라 비다·인생이여 만세)."
이 말이 꽤 익숙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대표곡 제목입니다. 콜드플레이는 세계적으로 막강한 팬덤을 갖고 있으며, 최근엔 방탄소년단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콜드플레이의 리더 크리스 마틴이 영감을 받았던 한 그림의 제목에서 따온 건데요.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가 생애 마지막으로 그린 'Viva La Vida란 작품입니다.

칼로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유명하죠. 그런데 그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으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설익은 수박부터 잘 익은 수박까지 화폭에 가득 그렸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한 덩이엔 'Viva La Vida'라고 크게 적었습니다.

작품을 본 마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악재를 다 당하고도 다시 캔버스를 펼쳐놓고 그림에 몰두한 그가 매우 존경스럽다."
Viva la vida, 1954, 프리다칼로미술관
Viva la vida, 1954, 프리다칼로미술관
실제 칼로가 겪은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참담한 사고로 몸이 산산조각 났고,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외도로 마음도 크게 다쳤죠.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인생이여 만세"라고 외쳤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미술사에 길이 남은 여성 화가 칼로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말 극적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작품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2003년엔 영화 '프리다'가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다음 달엔 최정원·김소향 주연의 한국 창작 뮤지컬 '프리다'도 세종문화회관에 오른다고 합니다.

칼로는 6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어렸을 때부터 고통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오른쪽 발이 휜 탓에 다리를 절며 다녀야 했죠.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지만 칼로는 밝게 자라났습니다. 명문 학교였던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도 들어가, 의사로서의 꿈도 키워나갔습니다.
부서진 기둥, 1944,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부서진 기둥, 1944,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그러던 어느 날,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18살의 이 소녀에게 잔인하고 참담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하굣길에 그가 탄 버스와 전차가 부딪힌 겁니다. 그러면서 전차의 강철봉이 그의 척추와 골반을 관통했습니다. 버스가 폭발하면서 생긴 파편들은 칼로의 온몸에 박혔죠. 이 처참한 사고로 인해 칼로는 2년 동안 꼬박 누워 있어야 했고, 이후에도 처절한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칼로는 정말 강인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아마비로 힘들 때 자신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도와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듯, 온몸에 깁스를 한 채 가만히 누워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침대 캐노피 위로 전신 거울을 놓아달라 부탁하고,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자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부서진 육체를 바라보며 좌절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 화폭에 담은 것이죠.

칼로는 그렇게 평생 자신을 그렸는데요. 그의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5점이 모두 자화상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에 스스로를 그린다." 지독한 고독이 물씬 풍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응시하려 했던 칼로의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요. 의사들을 포함해 모두들 칼로가 걸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수차례의 수술 끝에 걷게 됐습니다. 이후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기적이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그런데 칼로에게 인생의 '두 번째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는 이 '사고'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두 번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첫 번째는 전차와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는 디에고를 만난 것이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누군가를 만난 것이 교통사고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니 놀라운데요. 하지만 그 대상인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짐짓 이해가 되기도 하실 겁니다.

칼로는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느낌대로 그린 작품들이 과연 어떤 수준인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다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의 소개를 받아 리베라에게 그림을 보여주게 됐죠. 당시 유명 화가이자 혁명가였던 리베라는 그의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으로 관능적이고 생생하게 빛난다. 나에게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다."

자신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 이 작품들의 숨은 진가를 거장이 알아봐 주다니 정말 감동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사람 사이엔 뜨거운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21살의 나이차에도 말이죠. 심지어 리베라는 앞서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갖고 있었고, 여성 편력이 심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변의 반대에도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칼로는 리베라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소원은 오직 세 가지다.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막상 칼로는 결혼 직후엔 작품 활동을 많이 하진 못했습니다. 리베라를 도와 멕시코 혁명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리베라는 공산당에서 축출됐고 칼로도 함께 공산당을 떠나게 됐습니다.

칼로가 리베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정성이었지만, 리베라는 외도를 일삼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칼로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리베라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아의 만남이었습니다. 칼로는 이 사실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몇 번을 찔렀을 뿐, 1935,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몇 번을 찔렀을 뿐, 1935,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그의 작품들엔 그 극심한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몇 번을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은 칼로가 신문을 본 후 그린 그림인데요. 연인을 살해한 남자가 "그저 몇 번 찔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고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이입한 겁니다.

이같이 칼로는 리베라의 연이은 외도, 그리고 세 번의 유산으로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로는 멕시코로 망명 온 러시아 정치인 레온 트로츠키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리베라에 대한 복수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혼자만의 길도 가기 시작했습니다. 1938~1939년엔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며 '리베라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과 작품도 널리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엔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이 그의 그림을 구입하기도 했는데요. 이로써 칼로는 루브르에 입성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가 됐습니다. 칼로의 작품을 본 프랑스 초현실주의 미술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예술은 폭탄을 두른 리본이다"라고 호평하기도 했죠.

하지만 칼로에겐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1939년 말 리베라의 요구로 이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리베라를 미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했던 칼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훌쩍 떠났는데요.

1년 후 리베라가 다시 찾아와 두 사람은 재결합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영혼을 짓밟았던 리베라를 결코 잊을 순 없었나 봅니다. 실제 칼로의 자화상 가운데엔 '내 마음속의 디에고(테후아나 여인으로서의 자화상)'처럼 자신의 이마에 남편의 얼굴을 그려 넣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리베라를 향한 크고도 깊은 애증을 잘 느낄 수 있죠.
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 개인소장
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 개인소장
이후 두 사람은 나름 평온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칼로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른발이 썩어 잘라내기까지 했죠. 그리고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다시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리베라와 지인들은 그런 칼로를 위해 1953년 고향인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어줬고, 칼로는 침대에 누운 채 전시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로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 걸까요. 그가 마지막으로 쓴 일기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길."

생애 마지막 순간 "인생이여 만세"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길" 바랐던 칼로. 그 복잡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힘들었던, 그러나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갖고 찬란한 삶을 살았던 칼로가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