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중국 견문록'엔…"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조평규의 중국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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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머니이스트
표해록 통해 살펴본 중국 전략법
표해록 통해 살펴본 중국 전략법
'표해록'은 조선 성종 때인 1488년 최부(崔溥)가 쓴 중국 견문록입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평가받습니다.
이 견문록에서 조선 성종 19년(1488)에 종5품의 중앙관리 최부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로 공무를 집행하러 갔습니다. 그랬다가 부친상을 당해 급히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게 됩니다. 최부의 배는 풍랑에 휩쓸려 제주로부터 13일간 표류해 중국 저장성 태주부 바닷가에 도착합니다.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의 저장성을 출발해 닝보, 쑤저우, 항저주, 양저우, 시저우, 창저우, 텐진, 베이징, 산하이관, 랴오둥, 압록강, 의주를 거쳐 136일만에 생환하여 기록한 보고서의 기행문입니다.
옛날에는 배가 표류를 당하면 배가 부서지지 않더라도 바다에 빠지거나 기갈에 들리거나 병으로 절반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변방의 군인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최부 일행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도 일행 43명 중 한 사람의 낙오나 희생 없이 생환했다는 겁니다.
최부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으면서도 조선 사대부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수준 높은 문장력으로 중국 지방 관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최부에게 공경을 표하고 배불리 먹게 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줬습니다. 아마도 그의 뛰어난 지적 수준과 인품 그리고 사대부의 기개가 엿보였기 때문에 얕잡아 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明)왕조도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사신을 제외하고는 외국인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사신 일행이 다녀야 하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중국의 실상을 보거나 기록하기에는 제한이 많았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에는 중국의 역참 제도·기후·산천·도로·관아·풍속 등 견문한 것을 날짜 별로 아주 상세히 기록돼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게 평가 받습니다.
표해록에는 '중국인들은 도교와 불교를 믿고 귀신을 숭상하며, 말할 때 손을 흔들고 성이 나면 이마를 찌푸리고 침을 뱉는다. 모두 상업을 주요하게 생각해 벼슬이 높은 사람들도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며 작은 눈금으로 이익을 따진다'라는 문구도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조선과 달리 상업을 숭상하는 사회임이 잘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중국인들은 최부에게 '그대 나라에 어떤 좋은 기술이 있기에, 수(隋)와 당(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수당 대군을 물리친 우리 고구려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현재의 중국 정권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해 중국화 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에 의해 자기들이 패한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물음에, 최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합쳐서 한 나라가 됐고 조선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놀랍고 당당한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랴오둥을 지나면서 최부는 중국 관리들에게 랴오둥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빼앗겨 중국에 귀속된 땅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식견 그리고 애국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해록에는 '베이징이나 톈진을 지나면서 큰바람이 불어 모래 먼지가 온 하늘에 가득 차 눈을 뜰 수 없었다'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를 보아 600년 전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황사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중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드 배치에 대한 '3불 약속', 문 대통령의 '중국은 높은 산' 발언과 같은 우리 정부와는 달리, 최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기개 있는 대처와 의연한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만큼의 자존심도 없는 것인지 개탄스럽습니다.
중국이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중국을 너무 크게 보고 맞서 보지도 않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급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한다면, 중국은 어려운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와 실력에 따라 중국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거나,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중국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또 정치적인 보복으로 현지 우리기업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다양한 반칙을 하는 나라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최근 '역사결의'에서 보듯 이념적 신(新)전체주의로 퇴보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부가 지적했듯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아오는 전략적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 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조평규 경영학박사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이 견문록에서 조선 성종 19년(1488)에 종5품의 중앙관리 최부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로 공무를 집행하러 갔습니다. 그랬다가 부친상을 당해 급히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게 됩니다. 최부의 배는 풍랑에 휩쓸려 제주로부터 13일간 표류해 중국 저장성 태주부 바닷가에 도착합니다.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의 저장성을 출발해 닝보, 쑤저우, 항저주, 양저우, 시저우, 창저우, 텐진, 베이징, 산하이관, 랴오둥, 압록강, 의주를 거쳐 136일만에 생환하여 기록한 보고서의 기행문입니다.
옛날에는 배가 표류를 당하면 배가 부서지지 않더라도 바다에 빠지거나 기갈에 들리거나 병으로 절반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변방의 군인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최부 일행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도 일행 43명 중 한 사람의 낙오나 희생 없이 생환했다는 겁니다.
최부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으면서도 조선 사대부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수준 높은 문장력으로 중국 지방 관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최부에게 공경을 표하고 배불리 먹게 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줬습니다. 아마도 그의 뛰어난 지적 수준과 인품 그리고 사대부의 기개가 엿보였기 때문에 얕잡아 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明)왕조도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사신을 제외하고는 외국인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사신 일행이 다녀야 하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중국의 실상을 보거나 기록하기에는 제한이 많았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에는 중국의 역참 제도·기후·산천·도로·관아·풍속 등 견문한 것을 날짜 별로 아주 상세히 기록돼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게 평가 받습니다.
표해록에는 '중국인들은 도교와 불교를 믿고 귀신을 숭상하며, 말할 때 손을 흔들고 성이 나면 이마를 찌푸리고 침을 뱉는다. 모두 상업을 주요하게 생각해 벼슬이 높은 사람들도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며 작은 눈금으로 이익을 따진다'라는 문구도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조선과 달리 상업을 숭상하는 사회임이 잘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중국인들은 최부에게 '그대 나라에 어떤 좋은 기술이 있기에, 수(隋)와 당(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수당 대군을 물리친 우리 고구려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현재의 중국 정권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해 중국화 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에 의해 자기들이 패한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물음에, 최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합쳐서 한 나라가 됐고 조선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놀랍고 당당한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랴오둥을 지나면서 최부는 중국 관리들에게 랴오둥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빼앗겨 중국에 귀속된 땅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식견 그리고 애국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해록에는 '베이징이나 톈진을 지나면서 큰바람이 불어 모래 먼지가 온 하늘에 가득 차 눈을 뜰 수 없었다'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를 보아 600년 전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황사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중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드 배치에 대한 '3불 약속', 문 대통령의 '중국은 높은 산' 발언과 같은 우리 정부와는 달리, 최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기개 있는 대처와 의연한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만큼의 자존심도 없는 것인지 개탄스럽습니다.
중국이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중국을 너무 크게 보고 맞서 보지도 않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급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한다면, 중국은 어려운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와 실력에 따라 중국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거나,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중국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또 정치적인 보복으로 현지 우리기업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다양한 반칙을 하는 나라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최근 '역사결의'에서 보듯 이념적 신(新)전체주의로 퇴보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부가 지적했듯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아오는 전략적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 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조평규 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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