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순의 과학의 창]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성공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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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양자컴퓨터에 관한 관심이 무척 높다. 그 덕분에 양자컴퓨터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한 책이나 글, 동영상도 무척 다양하고 많아졌다. 비트라고 부르는 0과 1의 이진법적 구분으로 정의된 정보의 단위를 사용하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양자컴퓨터는 큐빗이라고 하는 0과 1이 중첩된 상태를 정보의 단위로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본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큐빗의 발견 시점은 큐빗의 의미나 정의, 그 활용 가치 등을 인지한 시점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1922년 2월에 진행된 실험이 큐빗의 존재를 인간이 최초로 인지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흔히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라고 일컬어지는 연구를 통해 독일의 두 물리학자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는 ‘양자자석’의 특성을 처음으로 관측했다.
이들은 은(銀)원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막대자석을 단순히 아주 작게 줄여놓은 것이라면, 이 자석은 3차원 공간상에서 무작위적인 방향을 가리킬 것으로 생각했고, 이런 무작위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설계했다. 그런데 실제론 은원자로 이뤄진 자석은 그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가해준 자기장의 방향에 평행하거나, 180도 반대 방향의 딱 두 가지 상태로 ‘양자화’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양자컴퓨터에 이와 같은 ‘은원자 자석’을 사용하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은원자의 이 두 가지 상태가 큐빗의 0과 1에 해당한다.
과학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이 대부분 그렇듯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의 성공에도 탁월한 실험 설계, 반복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결의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의 요건 외에도 약간 어쩌면 그 이상의 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두 사람이 실험에 착수한 지 얼마 안 돼 독일은 역사상 유례가 드문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연구비 확보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도 1차 대전 이후 인도주의적 지원의 일환으로 록펠러재단을 비롯한 미국 자본이 독일의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골드만삭스 창업자인 마커스 골드만의 아들 헨리 골드만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연구비를 지원했다. 이 실험이 골드만 집안이 뿌리를 둔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행됐다는 것 외에 헨리 골드만이 이 실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았으니 이도 운이 좋았다면 좋았던 셈이다.
물론 골드만이 프랑크푸르트 출신이 아니었다거나, 슈테른이 싸구려 시가를 피우지 않았다고 해서 큐빗의 발견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초 양자역학 연구는 물리학계에서 피해갈 수 없는 흐름이었기에 두 사람이 은원자를 검출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거나,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방법으로 양자자석의 신비를 밝혀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22년 2월, 그 모든 노력과 우연이 겹쳤기에 우리는 슈테른과 게를라흐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 사실로부터 운이나 우연이 끼지 않은 순수한 실력만의 성공이란 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노라면 자신의 성공을 대할 때는 겸손해지고, 자신의 실패를 대할 때는 이를 극복할 용기가 생기는 듯하다. 마침 오늘(2월 17일)이 오토 슈테른의 출생일이기도 하니 우연에 대해 생각해 보기 딱 좋은 날이다.
최형순 KAIST 물리학과 교수
큐빗의 발견 시점은 큐빗의 의미나 정의, 그 활용 가치 등을 인지한 시점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1922년 2월에 진행된 실험이 큐빗의 존재를 인간이 최초로 인지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흔히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라고 일컬어지는 연구를 통해 독일의 두 물리학자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는 ‘양자자석’의 특성을 처음으로 관측했다.
이들은 은(銀)원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막대자석을 단순히 아주 작게 줄여놓은 것이라면, 이 자석은 3차원 공간상에서 무작위적인 방향을 가리킬 것으로 생각했고, 이런 무작위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설계했다. 그런데 실제론 은원자로 이뤄진 자석은 그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가해준 자기장의 방향에 평행하거나, 180도 반대 방향의 딱 두 가지 상태로 ‘양자화’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양자컴퓨터에 이와 같은 ‘은원자 자석’을 사용하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은원자의 이 두 가지 상태가 큐빗의 0과 1에 해당한다.
부호의 연구지원과 '쥐꼬리 월급'
물론 당시에 그 결과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실험을 설계할 당시 슈테른은 닐스 보어가 제안한 원자 내부의 양자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슈테른은 “보어의 이런 얼토당토않은 모델이 옳다고 증명된다면, 난 물리학 연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양자화된 원자 모델을 불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담이지만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슈테른은 정말 물리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에 수행한 양성자의 자성 연구로 노벨상까지 받았으니 그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과학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이 대부분 그렇듯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의 성공에도 탁월한 실험 설계, 반복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결의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의 요건 외에도 약간 어쩌면 그 이상의 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두 사람이 실험에 착수한 지 얼마 안 돼 독일은 역사상 유례가 드문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연구비 확보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도 1차 대전 이후 인도주의적 지원의 일환으로 록펠러재단을 비롯한 미국 자본이 독일의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골드만삭스 창업자인 마커스 골드만의 아들 헨리 골드만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연구비를 지원했다. 이 실험이 골드만 집안이 뿌리를 둔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행됐다는 것 외에 헨리 골드만이 이 실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았으니 이도 운이 좋았다면 좋았던 셈이다.
성공은 노력과 행운의 합작품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성공의 비결에는 또 한 가지 비화가 있다. 두 사람은 미량의 은원자를 평판에 증착해 그 모양을 분석하려고 했는데, 실험이 끝난 후 검출판을 살펴보니 은원자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슈테른이 피우던 싸구려 시가 연기가 검출판에 닿자 은원자가 증착된 부분만 검게 변했는데, 이는슈테른의 표현을 빌리자면‘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질 좋은 시가를 피울 여유가 없었던 덕분’이었다. 싸구려 시가 연기에 다량 함유된 황 성분으로 인해 황화은이 생성되면서 검게 변한 것이었다.물론 골드만이 프랑크푸르트 출신이 아니었다거나, 슈테른이 싸구려 시가를 피우지 않았다고 해서 큐빗의 발견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초 양자역학 연구는 물리학계에서 피해갈 수 없는 흐름이었기에 두 사람이 은원자를 검출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거나,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방법으로 양자자석의 신비를 밝혀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22년 2월, 그 모든 노력과 우연이 겹쳤기에 우리는 슈테른과 게를라흐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 사실로부터 운이나 우연이 끼지 않은 순수한 실력만의 성공이란 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노라면 자신의 성공을 대할 때는 겸손해지고, 자신의 실패를 대할 때는 이를 극복할 용기가 생기는 듯하다. 마침 오늘(2월 17일)이 오토 슈테른의 출생일이기도 하니 우연에 대해 생각해 보기 딱 좋은 날이다.
최형순 KAIST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