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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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요청으로 제 명의로 A사 유상증자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A사가 완전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 위기에 몰리자, 자금을 넣는 것처럼 '가장납입'을 작전을 짠 것입니다. 제 명의로 들어갔던 자금은 유상증자가 끝나자마자 되돌려줬습니다(찍기). A사가 잔고 증명서를 발급받는 즉시 입금된 돈을 전액 인출해 수수료와 함께 준 것입니다. 통장 등 서류상에 숫자만 찍어놓고 현금을 바로 빼는 것입니다. 통장엔 100억원이 찍혀있지만, 실제 100억원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간 것이죠."-사채업자 김모씨

대다수 기업이 기를 쓰고 기업공개(IPO)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자금조달' 때문이다. 상장을 하게 되면 유상증자나 전환사채(CB) 등 회사채 발행이 쉬워지면서 자금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다.

상장사는 유증·CB 외에도 신주인수권부사채(BW), 교환사채(EB) 등의 신종 사채 발행이 가능하다. 발행 한도도 비상장 기업에 비해 많다. 또 불특정 다수에게서 '이자를 물지 않는' 투자금을 모을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일부 코스닥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꺾기' '찍기' 등의 불법이 횡행하고 있다. 자기 돈은 한푼도 쓰지 않고 사채업자를 끌어들여 회삿돈을 맘대로 유용하고 있다.

채워놓으면 그만?…코스닥시장 은어 '꺾기'와 '찍기'

우선 코스닥시장에서 은어로 사용되는 '꺾기'와 '찍기'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상증자 등을 통해 납입된 자금 중 일부가 증자 다음 날 별도의 계좌로 빠져나가는 거래를 주식시장에서 꺾기라고 부른다. 자금을 일부 빼돌리는 수법이다.

찍기는 기업에 아예 남는 돈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찍기는 사채업자가 증자 다음 날 전액을 인출해 가 버린다. 사채업자는 선이자를 챙김으로써 일종의 수수료 수익을 거둔다. 꺾기는 증자 대금의 일부라도 내부 자금으로 남아있지만 찍기는 그 마저도 없는 셈이다. 회사에는 돈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공식적으로는(?) 자금을 조달한 것처럼 꾸며진다.

선수라고 불리는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과정을 '가장납입'이라고 한다. 당연히 불법이다. 상대적으로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튼튼하지 못한 코스닥 상장사들이 주로 활용한다. 담보 부족으로 금융권에서 사실상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상장폐지를 막기 위해 사채(私債) 시장을 찾다 보니 이름뿐인 증자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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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폐지를 피하기 위해 찍기와 꺾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좀비 기업으로 불렸던 B사는 사업연도말 결산을 며칠 앞두고 가장납입을 전제로 한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당시 가장납입을 마친 B사의 자본잠식률은 60%대가 됐다. 100억원의 가장납입이 없었다면 완전자본잠식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B사는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며 상장폐지 위기를 모면했다.

코스닥시장의 관리종목 지정 및 상장폐지 기준에 따르면 사업연도(반기)말 자본잠식률이 50%일 경우 관리종목에 지정된다. 최근년말에 완전자본잠식일 경우에는 시장에서 퇴출된다. B사는 이러한 요건을 맞추기 위해 일단 '숫자만 맞추자'며 꺾기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겉만 멀쩡하면 문제없다는 방식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B사는 가장납입으로 상장폐지라는 급한 불은 껐지만 이후 경영진들의 횡령·배임 혐의가 드러나면서 상장폐지 대상에 오르게 됐다. 조사 과정에서 가장납입 혐의까지 추가됐다. 다시 상장폐지 위기에 몰리며 소액주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가장납입으로 상장사 '접수'…회삿돈을 쌈짓돈처럼

기업사냥꾼들의 무자본 인수·합병(M&A) 과정에서도 꺾기와 찍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기업사냥꾼들은 자기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사채를 끌어들여 상장기업을 장악한 뒤 횡령 등의 수법으로 회사 자금을 빼돌린다. 결국 상장폐지 또는 폐지직전 상황까지 끌고 간다.

이들은 거짓 유상증자를 하면서 사채업자의 돈으로 은행에 증자대금(주금)을 낸 뒤, 은행이 주금납입 보관증명서를 발급하면 회사 계좌에 있어야 할 주금을 곧바로 전액 인출해 사채업자에게 갚는다. 여기서 일부 자금만 나가게 되면 꺾기, 전액이 다 인출되면 찍기가 된다.

회사는 감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에 빼나간 자금을 다시 채워놓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금조달이 쉽지 않은 한계기업 특성상 대부분 외부 감사에서 드러난다. 이 경우 감사의견 '거절' 등의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하게 된다.

일부 자금만 빼내는 꺾기 과정에서 돈을 빌린 사채업자 관계자를 상장사 내부 직원으로 채용하는 경우도 있다. 사채업자한테 지급해야 할 수수료를 월급이란 명목으로 지불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출근도 하지 않고, 유령 직원처럼 회사 장부에만 이름을 올려놓는다.

통상 가장납입은 한계기업에서 주로 발생한다. 최대주주의 변경이 너무 빈번하거나 매출액보다 큰 증자에 나설 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자금조달은 신사업 추진, 운영자금 확보 등의 명목으로 진행한다.

또 다른 상장사 C사의 경우에도 자본잠식으로 인한 상장폐지를 피하고자 사채업자의 자금을 빌려 100억원 유상증자를 한 뒤 곧바로 신주 납입금을 인출해 갚기도 했다. 회사 회계장부에는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으로 건물을 산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코스닥시장 한 관계자는 "회사의 최대주주 및 경영진이 빈번하게 변경되는 것, 사모 유증과 CB 발행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경우 등은 대표적인 회계부정의 징후"라면서 "자금조달 후 대여금이나 선급금 등의 규모가 급증하는 경우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은혁 한경닷컴 기자 ehry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