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인간을 보는 개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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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짐승까지 기만하는
정치인들에게 안 속는 게 정치발전
대통령 고르며 유념할 것은
'인간을 보는 개의 눈동자'일지도
"위선 떨며 권세·부귀 탐하지 마라"
국민은 요구할 자격 있어
이응준 시인·소설가
정치인들에게 안 속는 게 정치발전
대통령 고르며 유념할 것은
'인간을 보는 개의 눈동자'일지도
"위선 떨며 권세·부귀 탐하지 마라"
국민은 요구할 자격 있어
이응준 시인·소설가
“행복이는 저에게 자식과 같습니다. 행복이는 ‘이가(李哥)’입니다. ‘이행복’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전직 성남시장이다. 그리고 행복이는 개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30년지기 형님이 있다. 내가 16년간 동고동락하던 반려견의 화장(火葬)을 치른 뒤 유기견을 입양해 6년째 지내고 있는 걸 줄곧 곁에서 지켜본 그가 이런 얘길 했다. “고향인 어촌에서는 개를 자주 잡아먹었다. 끓는 솥에서 개가 튀어나오기도 했지. 그런데 그 개가 주인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드는 거야. 내가 아는 개와 인간은 이런 것밖에는 없었는데, 너와 네 개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
정치인이 제 개를 버리는 걸 두 번 봤다. 전임 서울시장은 진돗개들을 세금으로 기르다가 서울대공원으로 보내버렸다. 동물원에 진돗개라. 해괴한 일이었다. 그가 집무실에서 그 개들과 얼굴을 부비며 찍었던 사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양된 유기견 행복이의 아빠인 전직 성남시장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경기지사가 되면서 ‘제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아이는 성남시청 에어컨 실외기 옆에서 삐쩍 말라 고통받다가 파양된 뒤 어딘가로 다시 입양됐다. 비난이 있자, 그가 답했다. 애초에 내 ‘개’가 아니라 성남시의 ‘재산’이라고. 내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라고.
이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자식’처럼 개를 키워본 사람은 딱 안다. 제 자식이 개가 됐다가 남의 물건으로 둔갑하는 요술도 요술이려니와, 그가 떠나자 행복이가 불행에 학대받다 결국 파양돼 구조되듯 재차 입양된 사실 자체가 행복이의 진짜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증언한다. 법인은 입양이 불가해서 성남시 공무원이 입양인으로 등록했던 것이라니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쇼였다. 행복이 아빠가 제 아들을 챙겨서 집으로든 경기도청으로든 데려갈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만약 그의 정적들이 이를 두고 공격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대중에게 엄청 욕만 얻어먹고 대신 그는 칭송받았을 것이다.
천만 번 양보해 그 상처투성이 개 한 마리가 성남시의 재산이라고 한들, ‘아수라’적인 범죄 추정 사건들은 둘째치고 ‘기생충’적으로 법인카드 횡령을 일삼는 청백리(淸白吏)께서 할 소리는 절대 아니다. 또한 시의 소유를 그렇게 관리하다가 아예 남에게 줘버린 시 공무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조폭이 제공한 차를 타고 다니던 그 후임 여시장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요식으로 포장된 거짓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팩트라고 한다. 정치 사기에 다 쓰인 뒤 쓸모가 없어진 ‘쓰레기’니 내다버린 것이다. 향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런 사례를 여야 없이 중범죄로 취급하길 촉구한다.
고작 개 따위로 정치를 논하느냐고? 저런 자들의 사기가 성립되는 까닭은 인간이 개보다 사랑이 많거나 순수해서가 아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있다면, 끓는 솥에서 튀어나와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개의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이 뭔지 알고 싶은가? 유기견보호소에 가보면 된다. 거기서 인간이라는 것의 실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가 제 형수님에게 맨정신으로 차분하게 퍼붓던 뭘 찢어버리겠다는 말보다 나는 이 일이 더 무섭다. 이게 그의 영혼의 핵심이자 은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술 취한 난교판”이라며 불신하던 ‘민주 선거’, 대통령 선거가 금방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감시할 뿐이다. 차악을 선택한다. 정치인들이야 다 꼴 보기 싫지만, 그중 제일은 사람에게도 모자라 말 못하는 짐승까지 기만하는 것들이다. 이념을 떠나 이런 정치인들에게 속지 않는 게 정치 발전일 것이다. 대통령을 고르며 유념할 것은, ‘인간을 보는 개의 눈동자’일지도 모른다. 위험천만한 거짓말쟁이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개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진 않겠다. 가령, 개를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해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제발, 개에 대한 사랑을 도용해 위선을 떨며 권세와 부귀를 탐하지는 마라. 국민은 그걸 요구할 자격이 있다. ‘전직’ 행복이 아빠 같은 정치인이 원하는 국민은, 끓는 솥에서 튀어나와서도 자기에게 꼬리를 치는 국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개가 내 자식이라고 떠벌리고 싶진 않다.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자기 개를 버린 자는 제 나라도 배신할 수 있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30년지기 형님이 있다. 내가 16년간 동고동락하던 반려견의 화장(火葬)을 치른 뒤 유기견을 입양해 6년째 지내고 있는 걸 줄곧 곁에서 지켜본 그가 이런 얘길 했다. “고향인 어촌에서는 개를 자주 잡아먹었다. 끓는 솥에서 개가 튀어나오기도 했지. 그런데 그 개가 주인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드는 거야. 내가 아는 개와 인간은 이런 것밖에는 없었는데, 너와 네 개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
정치인이 제 개를 버리는 걸 두 번 봤다. 전임 서울시장은 진돗개들을 세금으로 기르다가 서울대공원으로 보내버렸다. 동물원에 진돗개라. 해괴한 일이었다. 그가 집무실에서 그 개들과 얼굴을 부비며 찍었던 사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양된 유기견 행복이의 아빠인 전직 성남시장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경기지사가 되면서 ‘제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아이는 성남시청 에어컨 실외기 옆에서 삐쩍 말라 고통받다가 파양된 뒤 어딘가로 다시 입양됐다. 비난이 있자, 그가 답했다. 애초에 내 ‘개’가 아니라 성남시의 ‘재산’이라고. 내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라고.
이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자식’처럼 개를 키워본 사람은 딱 안다. 제 자식이 개가 됐다가 남의 물건으로 둔갑하는 요술도 요술이려니와, 그가 떠나자 행복이가 불행에 학대받다 결국 파양돼 구조되듯 재차 입양된 사실 자체가 행복이의 진짜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증언한다. 법인은 입양이 불가해서 성남시 공무원이 입양인으로 등록했던 것이라니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쇼였다. 행복이 아빠가 제 아들을 챙겨서 집으로든 경기도청으로든 데려갈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만약 그의 정적들이 이를 두고 공격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대중에게 엄청 욕만 얻어먹고 대신 그는 칭송받았을 것이다.
천만 번 양보해 그 상처투성이 개 한 마리가 성남시의 재산이라고 한들, ‘아수라’적인 범죄 추정 사건들은 둘째치고 ‘기생충’적으로 법인카드 횡령을 일삼는 청백리(淸白吏)께서 할 소리는 절대 아니다. 또한 시의 소유를 그렇게 관리하다가 아예 남에게 줘버린 시 공무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조폭이 제공한 차를 타고 다니던 그 후임 여시장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요식으로 포장된 거짓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팩트라고 한다. 정치 사기에 다 쓰인 뒤 쓸모가 없어진 ‘쓰레기’니 내다버린 것이다. 향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런 사례를 여야 없이 중범죄로 취급하길 촉구한다.
고작 개 따위로 정치를 논하느냐고? 저런 자들의 사기가 성립되는 까닭은 인간이 개보다 사랑이 많거나 순수해서가 아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있다면, 끓는 솥에서 튀어나와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개의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이 뭔지 알고 싶은가? 유기견보호소에 가보면 된다. 거기서 인간이라는 것의 실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가 제 형수님에게 맨정신으로 차분하게 퍼붓던 뭘 찢어버리겠다는 말보다 나는 이 일이 더 무섭다. 이게 그의 영혼의 핵심이자 은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술 취한 난교판”이라며 불신하던 ‘민주 선거’, 대통령 선거가 금방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감시할 뿐이다. 차악을 선택한다. 정치인들이야 다 꼴 보기 싫지만, 그중 제일은 사람에게도 모자라 말 못하는 짐승까지 기만하는 것들이다. 이념을 떠나 이런 정치인들에게 속지 않는 게 정치 발전일 것이다. 대통령을 고르며 유념할 것은, ‘인간을 보는 개의 눈동자’일지도 모른다. 위험천만한 거짓말쟁이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개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진 않겠다. 가령, 개를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해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제발, 개에 대한 사랑을 도용해 위선을 떨며 권세와 부귀를 탐하지는 마라. 국민은 그걸 요구할 자격이 있다. ‘전직’ 행복이 아빠 같은 정치인이 원하는 국민은, 끓는 솥에서 튀어나와서도 자기에게 꼬리를 치는 국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개가 내 자식이라고 떠벌리고 싶진 않다.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자기 개를 버린 자는 제 나라도 배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