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최근 논란이 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관련 안건을 25일 다루기로 예정한 가운데 정작 기금위 멤버인 정부부처 차관들은 대거 불참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굳이 경영계와 노동계, 자본시장까지 얽혀 있는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대는 데 부담을 느끼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관련 논의 사항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다음 정부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2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을 비롯해 박진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 등은 25일 오후 열리는 기금위 회의에 불참하겠다고 보건복지부에 통보했다. 이 차관과 박진규 차관은 해외출장 때문에, 박화진 차관은 다른 일정과 겹쳐 빠지게 됐다는 입장이다. 김종훈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불참 여부를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차관까지 빠지면 당연직 위원 전원이 불참하는 것이다. 이외에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과 이한나 법무법인 허브 변호사 등도 회의 불참을 통보한 상태다.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위는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각 부처 차관 5명이 당연직을 맡는다. 이밖에 사용자 대표 3명, 근로자 대표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관련 전문가 2명 등으로 구성된다.

이번 기금위가 주목받는 이유는 안건 중 하나인 ‘수탁자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 개정안’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 내 기금운용본부가 갖고 있는 대표소송 권한을 외부 위원들로 구성된 수탁위에 넘기는 내용이다. 이 안건이 통과되면 수탁위는 국내 주요 상장사들에 거의 모든 경영 간섭을 할 수 있는 전권을 갖게 된다.

△법령 위반 우려로 기업 가치가 훼손되거나 주주 권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안 △지속적으로 반대의결권을 행사했으나 개선이 없는 사안 △기후변화 관련·산업안전 관련 리스크 대응에 관한 사안 △이 밖에 기금운용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등 다양한 사안에 주주 제안을 할 수 있고, 대표소송 제기 여부도 결정한다. 이 때문에 경영계와 자본시장 전문가 사이에는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이 주도하는 수탁위가 국내 기업들의 경영 전반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앞서 이 안건은 지난해 12월 기금위에 상정됐다가 논란 끝에 한 차례 미뤄진 바 있다. 이번 회의는 정부 측 관계자와 이번 안건 상정을 강하게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홍 원장 등 빠지면서 또 한번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각 부처 실장 등이 대리참석하지만, 이 경우 의결권은 행사할 수 없다.

한 기금위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안건에 대해 정부 측 위원들이 대리참석을 시킨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논란이 많은 사안이므로 위원들도 부담을 느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차기 정부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정부 측도 안건 통과 강행에 따른 여론 반발 가능성 등을 의식하고 있다. 박진규 차관 대신 참석하는 주영준 산업부 산업정책실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기금 운용과는 거리가 먼 수탁위가 기업들에 소송을 걸고, 경영에 너무 간섭할 수 있다는 기업들의 우려가 많다”며 “산업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이 같은 사항을 회의에서 잘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기금위는 오는 4월 말에 열릴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20대 대선을 거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본격 가동된 후여서 위원장을 비롯한 당연직 위원, 그리고 시민단체 추천 몫의 위원들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 연기금 업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장·차관 등도 교체되거나 교체를 앞두고 있어 새로운 정책을 시작하기 어렵다”며 “인수위가 모든 사안에 관여하게 되므로 무리하게 안건을 밀어붙이기 힘들어진다”고 했다.

김재후/김종우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