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안녕하고, 오늘도 당당한 쿠르베 씨[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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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 그림이 발표됐습니다. 가로 7m, 세로 3m 크기에 등장인물만 40명이 넘는 대작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을 본 많은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오르낭의 매장'입니다. 그림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실까요. 대체 이 작품의 어떤 점 때문에 쿠르베는 그토록 신랄한 혹평에 시달렸을까요. 장례식 장면을 그렸기 때문일까요? 아님 작품이 어두워서일까요?
정답은 "너무 평범해서"입니다. 평범한 그림을 왜 그렇게 크게 그렸냐는 지적을 받았던 건데요. 평범하다는 게 이토록 비난받을 일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쿠르베 이전까지 미술 시장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떤 맥락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에 나왔던 대작들의 소재는 주로 역사나 신화 속 인물이었습니다. 죽음을 다룬 작품도 대부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엔 전부 평범한 사람들뿐입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난 이조차 사람들이 잘 모르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쿠르베가 고향 오르낭에서 치러진 자신의 먼 친척의 장례식을 그렸던 거죠. 결국 작품 속 망자도, 장례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평범한데 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그린 것처럼 크게 그렸냐는 비판을 받았던 겁니다.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쿠르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물,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존재들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천사를 그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단칼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그는 왜 이토록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에 천착한 걸까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된 쿠르베의 삶과 작품 세계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쿠르베는 어릴 때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대지주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가 고등학교로 간 이후 미술에 관심을 보이자, 이 또한 흔쾌히 받아들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쿠르베는 파리로 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아카데미에 다니긴 했지만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습니다. 미술관에 가 모사를 하는 등 자유롭게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익혔죠.
처음엔 쿠르베도 다른 화가들처럼 신화나 성서 속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1848년 그의 그림 인생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해 프랑스에선 파리 시민들이 왕정에 반대하며 일으킨 2월 혁명이 있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유럽 전역에서도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쿠르베는 시민들의 현실과 삶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1849년 오르낭으로 다시 돌아가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들' 등 현실에 있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854년엔 그의 대표작인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를 선보였는데요. 이 그림 또한 굉장히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의 원제는 '만남'으로, 제목대로 사람들이 만나 인사를 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쿠르베입니다. 가운데는 쿠르베의 후원자,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인물은 후원자의 하인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이 그림에서도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을 지원하고 그림을 사주는 후원가를 깍듯이 대하고 눈치를 보기도 했는데요. 이 그림에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 속에서 쿠르베는 허름한 등산복 차림을 한 채 무거운 화구통을 짊어지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턱을 한껏 들어 올린 채 후원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거죠. 반면 후원자는 모자를 벗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쿠르베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쿠르베는 이 그림에 이런 부제를 달았죠.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 돈 앞에서 절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담아낸 겁니다.
쿠르베는 1855년엔 '화가의 아틀리에'란 작품으로 또 한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당했습니다. 이 그림 역시 크기가 가로 6m, 세로 3m에 달하는데요. '오르낭의 매장'과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경건한 역사화도 아닌데 너무 크게 그렸다는 거였죠.
하지만 쿠르베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시장 근처에 직접 임시 공간을 만들어 '리얼리즘(Realism·사실주의) 전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포함해 40여 점의 그림을 전시했죠. 이를 통해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화가의 아틀리에'는 쿠르베 자신의 화실을 그린 겁니다. 이 작품의 부제는 '7년간의 예술 생애의 추이를 결정한 현실적 우화'인데요. 쿠르베 자신의 예술 생애에 영향을 준 것들을 한 그림에 모두 그려 넣은 것입니다.
가운데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쿠르베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을 나눠 그림을 살펴 보실까요. 왼쪽엔 고개를 푹 숙인 다수의 인물들이 보입니다. 노동자, 광대, 매춘부 등이죠. 쿠르베가 늘 응시하며 화폭에 담으려 했던 현실 속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엔 시인 보들레르, 저널리스트 프루동, 소설가 샹플뢰리 등 자신에게 영감을 준 정신적 지주들을 그렸습니다. 쿠르베는 샹플뢰리에게 편지를 써서 그림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표현했으며,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죠. 그러면서도 이들이 모두 자신의 예술 활동의 근원이 됐음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대의에 공감하고. 나의 애상을 지지하며, 나의 행동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이후 쿠르베는 1871년 다시 한번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에 동참했습니다. 이를 통해 탄생한 자치 정부 '파리 코뮌'에서 중책을 맡기도 했죠. 하지만 파리 코뮌이 붕괴되며 쿠르베는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873년 스위스로 망명을 가야했죠. 그리고 4년 후 그는 그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쿠르베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현실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봤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신념도 끝까지 놓지 않았죠. 그렇기에 쿠르베는 한결같이 안녕하고, 당당한 삶을 살았던 화가로 기억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이 작품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오르낭의 매장'입니다. 그림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실까요. 대체 이 작품의 어떤 점 때문에 쿠르베는 그토록 신랄한 혹평에 시달렸을까요. 장례식 장면을 그렸기 때문일까요? 아님 작품이 어두워서일까요?
정답은 "너무 평범해서"입니다. 평범한 그림을 왜 그렇게 크게 그렸냐는 지적을 받았던 건데요. 평범하다는 게 이토록 비난받을 일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쿠르베 이전까지 미술 시장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떤 맥락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에 나왔던 대작들의 소재는 주로 역사나 신화 속 인물이었습니다. 죽음을 다룬 작품도 대부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엔 전부 평범한 사람들뿐입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난 이조차 사람들이 잘 모르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쿠르베가 고향 오르낭에서 치러진 자신의 먼 친척의 장례식을 그렸던 거죠. 결국 작품 속 망자도, 장례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평범한데 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그린 것처럼 크게 그렸냐는 비판을 받았던 겁니다.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쿠르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물,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존재들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천사를 그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단칼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그는 왜 이토록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에 천착한 걸까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된 쿠르베의 삶과 작품 세계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쿠르베는 어릴 때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대지주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가 고등학교로 간 이후 미술에 관심을 보이자, 이 또한 흔쾌히 받아들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쿠르베는 파리로 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아카데미에 다니긴 했지만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습니다. 미술관에 가 모사를 하는 등 자유롭게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익혔죠.
처음엔 쿠르베도 다른 화가들처럼 신화나 성서 속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1848년 그의 그림 인생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해 프랑스에선 파리 시민들이 왕정에 반대하며 일으킨 2월 혁명이 있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유럽 전역에서도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쿠르베는 시민들의 현실과 삶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1849년 오르낭으로 다시 돌아가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들' 등 현실에 있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854년엔 그의 대표작인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를 선보였는데요. 이 그림 또한 굉장히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의 원제는 '만남'으로, 제목대로 사람들이 만나 인사를 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쿠르베입니다. 가운데는 쿠르베의 후원자,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인물은 후원자의 하인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이 그림에서도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을 지원하고 그림을 사주는 후원가를 깍듯이 대하고 눈치를 보기도 했는데요. 이 그림에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 속에서 쿠르베는 허름한 등산복 차림을 한 채 무거운 화구통을 짊어지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턱을 한껏 들어 올린 채 후원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거죠. 반면 후원자는 모자를 벗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쿠르베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쿠르베는 이 그림에 이런 부제를 달았죠.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 돈 앞에서 절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담아낸 겁니다.
쿠르베는 1855년엔 '화가의 아틀리에'란 작품으로 또 한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당했습니다. 이 그림 역시 크기가 가로 6m, 세로 3m에 달하는데요. '오르낭의 매장'과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경건한 역사화도 아닌데 너무 크게 그렸다는 거였죠.
하지만 쿠르베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시장 근처에 직접 임시 공간을 만들어 '리얼리즘(Realism·사실주의) 전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포함해 40여 점의 그림을 전시했죠. 이를 통해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화가의 아틀리에'는 쿠르베 자신의 화실을 그린 겁니다. 이 작품의 부제는 '7년간의 예술 생애의 추이를 결정한 현실적 우화'인데요. 쿠르베 자신의 예술 생애에 영향을 준 것들을 한 그림에 모두 그려 넣은 것입니다.
가운데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쿠르베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을 나눠 그림을 살펴 보실까요. 왼쪽엔 고개를 푹 숙인 다수의 인물들이 보입니다. 노동자, 광대, 매춘부 등이죠. 쿠르베가 늘 응시하며 화폭에 담으려 했던 현실 속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엔 시인 보들레르, 저널리스트 프루동, 소설가 샹플뢰리 등 자신에게 영감을 준 정신적 지주들을 그렸습니다. 쿠르베는 샹플뢰리에게 편지를 써서 그림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표현했으며,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죠. 그러면서도 이들이 모두 자신의 예술 활동의 근원이 됐음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대의에 공감하고. 나의 애상을 지지하며, 나의 행동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이후 쿠르베는 1871년 다시 한번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에 동참했습니다. 이를 통해 탄생한 자치 정부 '파리 코뮌'에서 중책을 맡기도 했죠. 하지만 파리 코뮌이 붕괴되며 쿠르베는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873년 스위스로 망명을 가야했죠. 그리고 4년 후 그는 그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쿠르베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현실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봤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신념도 끝까지 놓지 않았죠. 그렇기에 쿠르베는 한결같이 안녕하고, 당당한 삶을 살았던 화가로 기억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