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통상외교, 이제는 국가 안보다
한국은 좁은 국토에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인구도 5000만 명 정도여서 내수 규모가 크지 않다. 바깥 시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야만 국리민복을 실현할 수 있는 사정이고 보니 대외 관계를 적절히 설정·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간 안으로는 산업화에 괄목할 성과를 이뤘고, 밖으로는 세계화 물결에 순응하면서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교역 규모 세계 8위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주어진 여건은 바뀌지 않았다. 즉 바깥 세상에 대한 시각과 관찰, 그 바탕 위에서 그려내는 설계와 전략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정 운영에서 대외 관계를 관장하는 부서의 기능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다.

대규모 예산을 갖고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사업을 수행하는 현업 부서의 역할이 어느 것 하나 중요치 않은 것은 없겠으나, ‘대외’라는 특성으로 인해 국민의 일차적 관심에서 멀어지거나, 정부 안에서 역할이 위축된다면 세계 10위 선진국권에 진입한 나라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난 70여 년간 세계 통상 질서의 큰 흐름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출범-우루과이 라운드-세계무역기구(WTO) 설립과 세계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개방, 교역 자유화, 세계화를 가로지르는 저변의 가치는 효율성이었다. 곧이어 환경이 중요해지면서 지속가능성도 강조됐다. 그런데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WTO가 개점 휴업 상태가 되면서, 세계 어느 국가 지도자도 시장의 추가적 개방, 교역의 추가적 자유화를 주장하고 나서는 예를 보기 어렵게 됐다. 여기에 더해 미·중 무역갈등이 기술패권경쟁으로 이어지면서 효율성보다 더 심각하게 부각되는 화두는 공급망의 안정성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금융시장과 에너지, 곡물가 등 실물경제에 충격이 오고 있다. 무력충돌은 별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세계화의 결과로 상호의존이 심화된 상황을 이용한 공급망의 무기화는 글로벌 통상 질서는 물론 국제분업체제를 근저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특히 미래 먹거리 산업의 중요한 부품 소재인 반도체, 희토류와 같은 전략 물자의 안정적 공급이 경제의 안정적 운영과 직결되면서 효율성보다는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상황이 됐다. 미국은 첨단·핵심기술에서 우위 유지와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위해 동맹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을 분명히 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라는 경제안보질서의 새로운 판을 제시했다. 통상외교는 시장 개방과 국내 산업 보호 사이에서 득실을 따지던 과거와 달리 외교안보의 함수 안에서 방책을 세워야 하는 전략 과제가 된 상황이다.

2013년 통상 교섭에 관한 소관이 외교통상부에서 산업자원부로 이관됐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의 업무 성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나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외국과의 ‘교섭권’이 산업을 소관하는 부서로 옮겨간 것이다. 정부가 산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보호하면서 키워 내던 단계는 지났다. 오히려 전력 같은 산업 인프라를 잘 깔아주고 과도한 규제만 잘 정비하면 기업은 정부 훈수가 없을 때 더 잘할 수 있는 기량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산업을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기업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손대지 않는, 그러면서도 국민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품목이나 소재의 수급을 책임 있게 관리함으로써 경제 운용과 산업 생태계 유지·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겪었던 요소수 사태를 거울삼아 본다면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이제 통상정책은 개방과 보호 간의 줄다리기 정도를 넘어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과제가 됐다. 경제의 핏줄인 공급망의 안정성 확보와 기술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제안보 외교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서는 이런 국제적 흐름을 직시하고 통상조직의 새판을 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