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귀 이랜시스 대표가 비데용 댐퍼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김병근 기자
심재귀 이랜시스 대표가 비데용 댐퍼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김병근 기자
2002년 5월. 외환위기발(發) 자금난이 지속되면서 결국 다니던 회사가 파산했다. 중견기업 임원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지만 처자식을 생각하면 신세 한탄도 사치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직접 전자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공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고 나서 전 직장 전자사업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 9명을 설득해 함께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0명이 의기투합해 ‘맨땅에 헤딩’하기를 15년. 코스닥시장에서 2017년 기업공개(IPO)에 성공하고 이후 5년 연속 실적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인천에 있는 전자부품 제조업체 이랜시스 얘기다.

심재귀 이랜시스 대표(사진)는 “직장을 잃은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평생직장을 만들자고 결심하고 다 같이 그 꿈을 이뤘다”며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독보적인 기술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초일류 강소기업이 다음 목표”라고 밝혔다.

이랜시스는 비데와 공기청정기, 정수기 등 생활가전과 디지털도어록 부품 전문 제조사다. 비데와 공기청정기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이지만 이랜시스는 국내 경쟁사가 거의 없는 부품만 만드는 게 경쟁력으로 꼽힌다.

비데 뚜껑을 천천히 부드럽게 올리고 내리도록 돕는 부품 ‘댐퍼’가 대표적이다. ‘오일 댐퍼’는 국내 시장 점유율 80%, ‘일렉트릭 댐퍼’는 100%다. 코웨이 청호 노비타 등 대부분 비데에 탑재된다. 정수기를 사용할 때만 출수구(파우셋)가 나오도록 설계된 코웨이 노블 정수기를 구동하는 모터 모듈도 이랜시스가 만든다. 삼성 로봇청소기 몸체와 케이스 센서, 브러시 휠에도 이랜시스 기술력이 녹아 있다.
비데·도어록 핵심 부품으로 매출 1000억 도전
보안 부품 시장 지배력도 가전에 버금간다. 국내 가정과 사무실 등에서 사용되는 디지털도어록의 심장 역할을 하는 몸체(모티스) 10개 중 8개는 이랜시스가 제조한다. 도어록 모터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심 대표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외국 기술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기업 등 고객사가 주문한 대로 단순 가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설계·개발·제조하기 때문에 1등 제품이 많다”고 강조했다. 실적이 매해 불어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작년 매출은 782억원으로 전년 대비 28%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61% 늘어난 68억원을 기록했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대였다. 상장 후 영업이익은 2년째, 매출은 5년 연속 신기록이다. 올해엔 매출 ‘1000억원 클럽’에 가입할 것으로 증권가는 예상하고 있다. 비데와 청정기 부문의 내수·수출 물량이 같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정수기용 워터펌프와 안마기용 에어펌프 등 펌프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로봇청소기 시장 성장에 속도가 붙은 것도 긍정적이다.

이랜시스는 증가하는 일감을 소화하기 위해 본사를 이달 중순 인천 남구 도화동에서 청라로 확장 이전한다. 청라 공장의 생산 능력은 현재 대비 약 세 배에 달한다. 심 대표는 “물량이 많이 늘어 기존 공장도 이전 후 유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며 “차별화된 기술을 앞세워 국내 1등을 넘어 세계 1등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창업자인 심 대표는 작년 3분기 기준 이랜시스의 2대 주주(지분율 13.84%)다. 최대주주는 코스닥시장 상장사 이랜텍(21.89%)이다. 창업 때 성장성을 내다보고 이세용 이랜텍 회장이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한 게 인연이 됐다.

인천=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