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오펠리 가이야르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1번 프렐류드. /아파르테뮤직 채널

"바흐를 공부하라. 거기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출신의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한 얘기입니다. 진정한 음악을 하기 위해선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로 돌아가, 그의 작품들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거장이 꼽은 거장이라니, 말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브람스뿐만 아닙니다. 바흐는 '음악가들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이든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20세기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까지 모두 바흐의 음악을 토양으로 삼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오늘날 음악가들에게도 바흐는 반드시 거쳐야 하고 넘어야 할 커다란 산입니다. 또 그의 작품들은 언젠가 꼭 완벽히 소화해 내고 싶은 '음악의 본질' 자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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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무반주 첼로 모음곡' 'G선상의 아리아'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 바흐의 음악들을 듣고나서 '단조롭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실제 격정적이거나 화려한 선율은 그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바흐 음악의 진가는 여기서 나옵니다. 특유의 절제미, 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선율. 덕분에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바흐는 음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무려 7대에 걸쳐 80명이 넘는 음악가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풍족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음악 공부를 할 순 없었습니다.

그는 8남매 중 막내였는데요. 9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1년 후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행히 오르간 연주자였던 맏형의 도움을 받아 음악 공부를 이어갈 순 있었지만, 18살 이후엔 독립을 해 직접 돈을 벌며 음악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노르웨이체임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노르웨이체임버오케스트라 채널

그가 잡은 첫 직장은 바이마르 궁전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그곳에서 4개월 일한 후, 곧 자리를 옮겨 성보니파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됐습니다.

당시 교회의 흥망성쇠는 음악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교회 음악은 신도들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는 작곡을 비롯해 교회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결정하고 총괄했습니다. 바흐가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교회에서 일하며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거죠.

신앙심도 투철했던 그는 열심히 교회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 매일 밤을 지새우며 다른 음악가들의 악보를 필사하고, 자신의 곡도 만들었습니다. 바흐가 생전에 만든 작품 수만 1200여 곡에 달하는데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거장은 끊임없는 성실함과 부단한 노력으로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재밌는 점은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가 실제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전처가 세상을 일찍 떠나 결혼을 두 번 했는데요. 그 사이에서 20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고스란히 닮아 뛰어난 음악가가 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무대에 올려 세상에 바흐의 이름을 다시 알리기 전까진, 아들들이 더 유명했습니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BBC 채널

바흐는 독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했는데요. 그의 작품들은 머문 곳이 달라질 때마다 특성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흐의 음악 인생을 장소에 따라 나누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바흐가 괴텐 궁정 악장으로 일했던 괴텐 시기(1717~1723), 교회 음악감독이 된 라이프치히 시기(1723~1750)는 그의 음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부터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마그니피카트' 등 다양한 작품들이 괴텐 시기와 라이프치히 시기에 만들어졌죠.

바흐는 '대위법'을 발전시킨 인물로 유명합니다. 대위법은 하나의 선율로만 연주를 하던 것에서 나아가 2개 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매우 정교하고 촘촘하게 음을 쌓아올려 여러 악기로 협주를 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바흐의 마지막 작품 '푸가의 기법'은 그만의 대위법을 집대성한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흐는 악기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발견하고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쓸 당시, 첼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다른 고음 악기의 보조 수단 정도로 여겨졌죠. 하지만 바흐는 이 곡을 통해 첼로도 충분히 훌륭한 독주악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렸습니다.

바흐는 나이가 들어 시력이 많이 나빠진 상태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갈수록 시력이 악화됐지만 마지막 작품인 '푸가의 기법'을 완성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뇌출혈로 시력을 완전히 잃으며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됐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바흐. 평생 그의 음악에 천착했던 굴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데 단 한 작곡가만의 음악을 듣거나 연주해야 한다면, 틀림없이 바흐를 선택하겠다."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음악가들도 굴드와 동일한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