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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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트집을 잡아 징계를 내리는 등 괴롭힘을 반복한 상급자와 이를 방치한 대표이사 및 회사가 피해 근로자에게 위자료 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직장 내 괴롭힘을 가한 가해직원과 이를 방치한 회사에 공동 책임을 물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그간 인정 금액이 적었던 위자료도 1000만원까지 인정한 점은 의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회사 나가라"며 독방에 자리 배치하고 분리수거 시켜

서울동부지방법원 민사2-2민사부(재판장 이지현)는 지난 지난해 12월 3일 근로자 A가 금융 및 보험 관련 프로그램 개발사인 주식회사 B와 대표이사, 상급자를 대상으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같이 판단하고 A의 손을 들어줬다.

A는 2018년 11월 B사에 입사해 회사 설립작업에 참여하는 등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과장이었다. 회사는 이듬해부터 사소한 실수를 이유로 A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A가 업무용 노트북을 무단으로 반출했다거나, 이메일 전송 시 참조 기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시말서를 작성케 했다. 그 외에도 외근 중이던 A의 컴퓨터가 회사 이사 도중 파손됐다는 이유로 A에게 시말서를 작성케 했고 5월에는 아예 보안규정 위반, 업무 미숙, 기자재 파손 등을 이유로 서면 경고장을 보냈다.

이런 행각은 더 심해졌다. A의 컴퓨터에서 외부에 자료 유출이 가능한 원격제어 프로그램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근신 징계통보를 내렸으며, 6월에는 아예 대기발령과 함께 업무배제 명령을 내렸다. A에 퇴사를 권유했지만 듣지 않자 분리수거를 시키기도 했으며, A의 책상과 컴퓨터를 치우고 공용 회의실로 사용되던 독방에 A의 자리를 배치했다. 또 그 안에서 보험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수기로 요약하도록 하는 '깜지 작성' 지시도 함께 내렸다.

반복적으로 트집을 잡던 회사는 결국 A에 징계위원회를 열고 사실상 해고인 '명령휴직'을 통보했다.

이에 A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 A는 "과도한 시말서 작성과 업무 권한 및 직책 박탈, 독방 배치에 더해 '깜지 작성'이나 쓰레기 분리수거를 시키는 등 부당한 업무지시로 괴롭혀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며 부당해고와 괴롭힘에 대한 위자료 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청구했다.

◆법원 "괴롭힘 주도자 외에 방치한 대표·회사도 배상 책임"

회사는 "괴롭힌 게 아니라 업무과실 및 지시 불이행으로 인한 것"이라며 "A가 대화를 무단 녹음하고 직원 컴퓨터를 훔쳐보거나 상급자를 험담하는 등 업무분위기를 해한 탓에 적절한 조치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직원들의 업무분위기를 망쳤다며 3100만원을 배상하라는 반소를 했다.

법원은 A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회사 설립 당시 A는 업무용 노트북으로 집에서 업무를 봤으며 이를 회사 대표도 묵인해왔다"며 "A의 잘못이라고 지적한 사항 중 일부는 다른 직원의 잘못이었으며, A의 실수로 영업 비밀이 유출됐다거나 회사 영업에 지장을 줬다고 볼 자료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A가 사직 권고에 응하지 않자 쓰레기 분리 수거를 지시했고, 대기발령 이후 책상에서 컴퓨터 등 사무용 비품을 치우고 독방으로 회의실을 옮기거나 깜지를 작성하게 했다"며 "회사 측은 이런 업무지시가 모욕적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과장 직위의 A에 상당한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불법행위"라고 꼬집었다.

또 "A는 우울증을 동반한 적응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이는 회사의 불법행위가 원인"이라며 "직접 A를 괴롭힌 상급자와 이를 방치한 회사 대표이사, 상급자의 사용자인 회사는 공동불법행위자로 위자료 1000만원을 공동으로 배상하라"고 판시해 1심과 마찬가지로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의 반소 청구는 기각했다. 이번 판결로 해당 직원은 실업급여를 제외한 부당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과 위자료를 함께 지급받게 됐다.

◆인사권 행사와 괴롭힘, 구분 쉽지 않아…"증거 확보가 중요"

최근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는 경우 인정되는 위자료의 액수가 점점 올라가면서 근로자의 권리에 대한 법원의 인식도 강해지고 있다.

다만 정신적 고통을 인정받는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다. 특히 업무인사권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을 행사하는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사용자의 고유권한인 업무지시권이나 인사권 행사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괴롭힘으로 인정해 민법상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을 묻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관련 입증자료를 사용자가 독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상급자나 사용자라면, 괴롭힘이 있더라도 이를 목격한 동료들의 유리한 진술을 끌어내기 어렵다.

이럴 수록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한 노무법인 대표 공인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은 기본적인 녹음, 이메일이나 SNS 기록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의도적 업무배제와 같은 행위에 있어서는 업무현황, 참석자 등의 피해자가 배제된 기록을 확보하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간혹 괴롭힘의 수단으로 사적용무를 해달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엔 영수증, 결제기록, 물품의 사진촬영 등이 구체적 입증의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