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용산 이전] 변화 맞는 600여년 '사대문 한양도성'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종로·광화문 등 정치적 상징성은 약해질 듯…'경복궁 후원' 청와대 복원 관심
"서울 600년은 곧 '종로 600년'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역사가들은 서울과 종로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하기도 한다.
조선이 한양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잡은 이후 수도 서울의 역사가 시작됐으니 그 중심에 '종로 600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에 궁궐이 자리 잡고 있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경무대와 청와대가 자리하면서 600여년간 조선, 대한민국의 정치·역사의 중심에 있던 '사대문 안 한양도성' 시대도 변화를 맞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공식화하면서다.
윤 당선인은 이날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고, 5월 10일부터 새 용산 집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시 등 비상상황을 제외하고 조선왕조를 포함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통치권자가 이른바 '한양도성 사대문' 밖으로 집무실을 옮기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으로 가장 주목한 곳이다.
고려 숙종(1054∼1105) 때 풍수지리가 김위제는 상서에서 "삼각산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선경(仙境)이다.
그곳에서 시작한 산맥이 3중·4중으로 서로 등져 명당을 수호하고 있으니, 삼각산에 의지해 도읍을 세우면 9년 만에 사해(四海)가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에 고려 숙종이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설치했고, 당시 궁궐터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하들을 한양에 보내 궁궐, 종묘 등의 터를 정하게 했는데, 이들 역시 고려 남경의 궁궐터(경복궁 자리)였던 자리를 다시 골랐다.
조선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해 종묘·사직에 이어 경복궁을 지었고, 의정부(議政府)와 6조 등 주요 관아를 경복궁 정문 앞 거리 좌우로 배치했다.
또 이들을 방어할 도성(都城)을 쌓았고,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인 사대문 4 소문도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청와대 자리는 본래 경복궁 북쪽 후원으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렸다고 한다.
경무대에서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건물들이 헐렸고,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 정부로 이관돼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초대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
이어 1960년 8월 윤보선 대통령이 선출돼 입주하면서 청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도 청와대는 내내 대통령 집무실로 쓰였고, 광화문 앞에 조선왕조의 6조처럼 정부서울청사와 외교부, 서울지방경찰청 등 주요 시설이 자리해 각 기능을 계속 유지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있음에도 종로가 계속 '정치 1번지'로 불린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깊다.
시민사회 역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청와대와 가까운 광화문, 종로에서 주로 집회를 열어 왔다.
하지만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한양도성 밖인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서울의 역사는 새로 쓰일 전망이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중심이었던 사대문 안 종로·광화문 지역의 정치적 상징성은 전보다 약해질 전망이다.
청와대 부지 활용 방안은 아직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경복궁 후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역사가들은 서울과 종로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하기도 한다.
조선이 한양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잡은 이후 수도 서울의 역사가 시작됐으니 그 중심에 '종로 600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에 궁궐이 자리 잡고 있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경무대와 청와대가 자리하면서 600여년간 조선, 대한민국의 정치·역사의 중심에 있던 '사대문 안 한양도성' 시대도 변화를 맞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공식화하면서다.
윤 당선인은 이날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고, 5월 10일부터 새 용산 집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시 등 비상상황을 제외하고 조선왕조를 포함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통치권자가 이른바 '한양도성 사대문' 밖으로 집무실을 옮기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으로 가장 주목한 곳이다.
고려 숙종(1054∼1105) 때 풍수지리가 김위제는 상서에서 "삼각산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선경(仙境)이다.
그곳에서 시작한 산맥이 3중·4중으로 서로 등져 명당을 수호하고 있으니, 삼각산에 의지해 도읍을 세우면 9년 만에 사해(四海)가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에 고려 숙종이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설치했고, 당시 궁궐터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하들을 한양에 보내 궁궐, 종묘 등의 터를 정하게 했는데, 이들 역시 고려 남경의 궁궐터(경복궁 자리)였던 자리를 다시 골랐다.
조선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해 종묘·사직에 이어 경복궁을 지었고, 의정부(議政府)와 6조 등 주요 관아를 경복궁 정문 앞 거리 좌우로 배치했다.
또 이들을 방어할 도성(都城)을 쌓았고,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인 사대문 4 소문도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청와대 자리는 본래 경복궁 북쪽 후원으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렸다고 한다.
경무대에서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건물들이 헐렸고,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 정부로 이관돼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초대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
이어 1960년 8월 윤보선 대통령이 선출돼 입주하면서 청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도 청와대는 내내 대통령 집무실로 쓰였고, 광화문 앞에 조선왕조의 6조처럼 정부서울청사와 외교부, 서울지방경찰청 등 주요 시설이 자리해 각 기능을 계속 유지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있음에도 종로가 계속 '정치 1번지'로 불린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깊다.
시민사회 역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청와대와 가까운 광화문, 종로에서 주로 집회를 열어 왔다.
하지만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한양도성 밖인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서울의 역사는 새로 쓰일 전망이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중심이었던 사대문 안 종로·광화문 지역의 정치적 상징성은 전보다 약해질 전망이다.
청와대 부지 활용 방안은 아직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경복궁 후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