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586과 MZ 사이 놓인 '낀낀세대'
진보 성향 가장 강하고 권위·위선 거부
신자유주의 인정하지만 경쟁만능 비판
이제 40대가 우리 사회를 주도할 시간
끼어있단 말은 '다리' 놓을 수 있단 뜻
교량적·포용적·통합적 리더십 발휘해야
지난 3월 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두드러진 것은 지역투표와 세대투표다. 흥미로운 것은 지역투표 못지않게 세대투표가 우리 사회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세대투표의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선거들에서 세대투표의 구도는 2030세대 대 5060세대 간 대결로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의 구도는 4050세대 대 6070세대 간 대결로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인 자료를 보자. 3·9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2030세대에선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은 반면, 4050세대와 6070세대는 뚜렷한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윤 후보는 60대에서 32%포인트, 70대에서 41.4%포인트 차이로 이 후보를 앞선 반면, 이 후보는 40대에서 25.1%포인트, 50대에서 8.5%포인트 차이로 우위를 점했다.
이들 가운데 나의 관심은 40대에 있다. 투표 결과를 지켜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는 40대다. 진보라고 하면 이제까지 ‘586세대(1960년대에 태어났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50대)’를 떠올렸다. 이 586세대 역시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하는 ‘연령 효과’를 보여 온 반면,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40대가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꼽혀 왔다. 40대,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유사 586세대’라는 점이다. 1960년에 태어났지만, 1979년 대학에 입학했고, 2년 전 60대에 들어섰다. 아래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40대 외부에서 40대 내부를 바라본 사회학적 관찰과 분석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90년대 초 ‘X세대’로 불렸던 ‘자유의 아이들’
우리 사회에는 각 세대를 지칭하는 개념이 있다. 앞서 말한 586세대도 있고, 널리 쓰이는 MZ세대도 있다. 그런데 40대를 부르는 세대적 명칭은 없다. 그래서 3년 전 한 심포지엄에서 나는 ‘낀낀세대’라는 명칭을 제안한 적이 있다. ‘낀낀’에는 5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인, 앞과 뒤가 다 막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이 낀낀세대는 20대였을 때 ‘X세대’로 불렸다. X세대라는 말의 기원은 서구에서 왔다.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는 자신의 소설 《X세대》에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를 ‘X세대’라고 명명했다. ‘X’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앞선 냉전세대나 히피세대와는 다른,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탈권위적 의식을 갖고 있었고 소비문화에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세대를 ‘자유의 아이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벡에 따르면, 자유의 아이들의 등장은 현대사회 발전에 내재한 불가피한 흐름이다. 1980년대 이후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도래는 개인화 경향을 강화시켰고, 이는 다시 개인주의 가치와 정치를 확산시켰다. 자유의 아이들은 한편에서 소비와 욕망에 관심을 두지만, 다른 한편에선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결정을 중시했다.
우리 사회에서 X세대와 자유의 아이들의 다른 이름이 ‘신세대’였다. 현재 40대에 있는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뜨거웠던 ‘신세대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논쟁의 불을 댕긴 것은 1993년 미메시스가 발표한 책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였다. 그 부제는 ‘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위선주의를 거부하고 신세대의 새로운 감성 및 문화를 옹호했다.
사회학자 박재흥은 이 신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개인주의·탈권위주의·감성주의·소비주의를 제시한 바 있다. 이 경향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신세대가 드러낸 개인주의 성향이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신세대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했고,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충실하려 했던 첫 번째 세대였다.
무엇보다 신세대는 산업화 세대의 반공주의는 물론 586세대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념적 구속성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대신 이들은 개인의 감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부터 결코 작지 않은 세례를 받았다. 이 점에 착안해 나는 신세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로 명명한 적이 있다. ‘한국적 자유의 아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주목할 것은 20대 신세대론이 부상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다. 이 배경은 구조적 측면과 주체적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구조적 측면으로는 대내적 민주화와 대외적 탈냉전이 중요했다. 신세대에게 민주화는 낡은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탈냉전은 과도한 이념주의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지녔다.
한편 주체적 측면으로는 선배 세대인 586세대와의 차이가 중요했다. 1990년대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시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만큼 소비와 욕망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 민주화가 가져온 정치적 개방 속에서 성장한 만큼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문화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군부 권위주의 시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586세대와는 다른 사회화 과정을 경험한 세대가 바로 신세대였다.
두 가지 특성 ‘진보적 정치성향과 개인주의’
40대의 사회학적 관찰에서 신세대론을 주목하는 까닭은 이들의 ‘망탈리테(mentalit)’에 있다. 망탈리테란 프랑스 역사학자 그룹인 아날학파가 주조한 말이다. 특정한 시대의 개인들이 공유한 집단적 사고, 생활양식, 무의식을 포함한 심성을 뜻한다. 우리 사회처럼 사회변동이 급격히 진행되는 곳에서는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망탈리테가 존재할 수 있다. 이 망탈리테를 주목하는 까닭은 집합적 사고·생활양식·심성으로서의 망탈리테가 개인 및 집단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다.이런 망탈리테의 형성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의식이 획득되는 20대의 체험이다. 낀낀세대의 망탈리테 한가운데는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1980년대에 성취한 민주화의 가치에 공감하면서도 그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을 거부했다. 앞에 있는 586세대가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뒤에 있는 2030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낀낀세대의 이런 망탈리테가 처음부터 고정화돼 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망탈리테는 신세대의 개인주의를 핵심으로 간직하면서도 이후 사회변동에 대응해 변화해 왔다. 그 과정을 보면, 신세대의 개인주의는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된 이른바 ‘9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경제원리로 삼았지만, 이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경쟁력을 특권화시키는 ‘시장적 개인주의’를 강조했다. 이 시장적 개인주의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압박을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감성적 개인주의’와 결합해 낀낀세대의 복합적 내면을 구성하게 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1990년대로부터 시간이 흘러 2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낀낀세대의 내면풍경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특성을 주목하고 싶다. 첫째, 이번 대선 결과에서 볼 수 있듯, 낀낀세대는 정치적 차원에서 진보적 성향이 가장 강한 세대다. 연령 효과를 고려할 때, 낀낀세대 역시 앞으로 보수화할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진보적 성향이 매우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낀낀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 개인주의를 지지해 왔다. 40대는 다른 세대보다 본인의 학력과 노력을 중시한다. 이런 경향은 586세대, 2030세대와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젊은 시절 내면화한 신세대의 개인주의가 낀낀세대의 망탈리테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낀낀세대의 이런 특성은 이 세대의 실체에 가깝게 다가서게 한다. 젊은 시절 품게 된 감성·사유·세계관은 나이가 들면서 변하지만, 동시에 쉽게 퇴색하지 않는 도장의 붉은 인주처럼 선명히 각인돼 있다. 오늘날 낀낀세대의 내면세계는 앞서 말했듯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동시에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신자유주의를 인정하는 동시에 경쟁지상주의를 비판한다. 낀낀세대에게는 여전히 개인주의가 도도하게 저류(底流)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셈이다.
586과 MZ 양쪽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 기대
낀낀세대의 미래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선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한다. 먼저 비관론은 낀낀세대가 586세대의 장기적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주도적 세대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주목해 비관론적 견해는 낀낀세대가 586세대와의 경쟁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586세대와 낀낀세대는 그 놓인 자리가 달랐다. 586세대가 민주화 시대를 열었던 것에 비해 낀낀세대는 외환위기로 인해 생존을 추구해야 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는 과정에서 이미 안정된 자리를 차지한 586세대와는 달리 낀낀세대는 고용 위기 등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기가 더 힘들었다. 낀낀세대의 상처는 이중적이다. 97년 체제의 등장으로 인한 경제적 좌절의 상처가 하나라면, 586세대의 장기적 영향력에 따른 사회적 적응의 상처가 다른 하나다. 이 점에서 낀낀세대는 ‘상처받은 개인주의 세대’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낙관론은 낀낀세대가 앞으로 맡을 역할을 주목한다. 586세대의 역할이 길었던 것은 평균 수명 증가가 가져온 사회활동 연령 연장에서 찾을 수 있다. 586세대의 역할이 마감하는 현재, 낀낀세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는 바로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역사에서 시간을 이기는 세대는 없는 법이다.
현재 낀낀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리더십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것인지의 과제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5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MZ세대와 통한다. 끼어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점에서 낀낀세대에게 부여된 과제 중 하나는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이런 교량적·포용적·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대 문제는 어느 사회든 뜨거운 쟁점이다. 누구든 특정 세대에 속해 있는 만큼 세대 이야기에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귀 기울인다. 그러나 동시에 세대는 포괄적 개념이다. 세대 안에는 계급·이념·젠더 등의 균열이 존재하고, 이 변수들이 세대 변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럼에도 최근 지구적으로 세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우리 삶의 변화 속도에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사회 변동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이런 흐름은 세대 간 사회문화적 차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세대문화·세대갈등·세대정치에서 볼 수 있듯, 이제 세대는 분명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인의 하나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낀낀세대는, 앞에 놓인 586세대와 뒤에 놓인 MZ세대와 비교할 때, 사회적 관심에서 대체로 소외돼 왔다. 분명한 것은 이제 이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할 시간이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40대가 양쪽으로부터 끼어 있는 것을 넘어서 양쪽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교량적·포용적·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라는 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 김호기는
1992년부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와 스탠퍼드대 쇼렌스타인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1995),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1999),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2007), 《시대정신과 지식인》(2012), 《세상을 뒤흔든 사상》(2017),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2020) 등이 있다. 4월에 신기욱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 편집한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 The Threats of Illiberalism, Populism, and Polarization》을 출간할 예정이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민주주의를 분석한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