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창극단 신작 '리어', 물의 순환으로 풀어낸 어리석은 인간의 운명
“개울을 따라/달리고 장난치며/때로 벼랑을 만나/아득히 떨어지며/하얗게 부서져 소리치며 솟구치다/여울에 꿈을 꾸며/다시 흐르고 흘러 흘러//물이여/멀고 먼 길/너의 그 모든 노래/이제 잦아드는/저 가없는 바다.”

지난 2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창극 리어’(사진)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코러스의 주요 대목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을 작가 배삼식이 각색하고, 안무가 정영두가 연출한 국립창극단의 신작은 물로 시작해 물로 끝난다.

코러스는 극을 여는 합창에서 “물이여, 리어여”라고 외친다. 어리석은 욕심에 고고한 셋째 딸 코딜리어를 내치고,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그 충격에 미쳐서 광야를 헤매다 극적으로 재회한 코딜리어를 골육상잔의 전쟁에서 잃고, 그 슬픔에 빠져 숨을 거두는 리어의 파란만장한 삶을 물에 빗댄다. 여기서 물은 작가가 원작을 읽으며 떠올린, 대자연 속 다양한 형태로 순환하는 물의 모습이다. 리어의 첫 대사인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는 낮은 데로 임하는” 노자(老子)의 ‘물’이 아니다.

상선약수 등 ‘도덕경’의 여러 구절이 인용되지만 노자 사상은 극에 녹아들지 못한다. 오히려 무대를 지배하는 대자연 속 물의 은유와 충돌한다. 연출은 작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형상화한다. 극 초반 무대 전체에 채워진 물은 높낮이와 흐름을 달리하며 인물의 심리와 작품의 정서를 드러낸다. 물의 이미지를 표현한 배경음악이 깔린다. 코러스는 극의 상황을 설명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일반적인 역할보다는 작가의 해석이 담긴 시적인 ‘물노래’를 반복한다.

일부 장면과 캐릭터가 변형되고 압축됐지만 극은 원작의 플롯을 촘촘히 따라간다. 서사는 주로 정통 연극 스타일의 대사와 연기로 진행된다. 노래가 나올 때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인물의 절절한 심리를 표출하는 판소리 창(唱)은 감동적이다. 경기 민요와 국악가요 스타일의 노래도 나온다. 국악기와 양악기가 섞인 13인조 밴드가 노래 특성에 맞는 악기로 모나지 않게 반주한다.

유기적인 대본과 공들인 무대, 배우들의 열연 등 공연의 완성도는 높다. 하지만 대본도, 구성도, 연출도, 음악도 기존 음악극의 상투적인 기법과 관습에 의존한다. 창극이 아니라 창이 많이 들어간 음악극을 보는 느낌이다.

작가의 전작 ‘트로이의 여인들’(2016년)이 보여준 창작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과 혁신적인 무대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전작에서 판소리 양식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그리스 비극을 각색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작가 특유의 스타일과 해석을 전면에 드러냈다. ‘창극 리어’보다는 ‘배삼식의 리어’가 더 어울리는 무대였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