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2000년 10월 24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한경DB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2000년 10월 24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한경DB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3일(현지시간)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미국 정부 수립 후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첫 여성으로 꼽힌다. 2010년 미국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1937년 5월 15일 체코 프라하에서 마리아 아냐 코르벨로 태어난 그는 이후 매들린으로 개명했다. 기자 출신인 그의 부친 요세프 코르벨은 체코 대사관 공보관으로 일하다 194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올브라이트의 나이는 11세였다. 올브라이트는 유대인이었다. 조부모 4명 중 3명이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됐지만 그의 부모는 이를 끝까지 알리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뒤 체코의 한 신문 기사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홀로코스트에서 26명의 가족이 숨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 이민자 사회 적응을 위해 그의 부모가 유대계라는 사실을 숨겼을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체코어 폴란드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했던 올브라이트는 미 명문 여대인 웰슬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미 일간지 뉴욕데일리뉴스 설립 가문의 조지프 메딜 패터슨 올브라이트와 1959년 결혼해 세 딸을 낳았다.

올브라이트는 에드 머스키 전 민주당 상원의원의 수석 법률 보좌관으로 1972년 정계에 입문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1976년 백악관 업무를 시작하면서 올브라이트에게 연락관 업무를 맡겼다. 폴란드 이민자였던 브레진스키는 올브라이트가 박사학위를 받은 컬럼비아대 담당 교수였다.

올브라이트는 1982년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받은 합의금으로 백만장자가 됐다. 민주당 여성 정치인 후원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아칸소 주지사였던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다. 1993년 클린턴 1기 행정부 시작과 함께 유엔 주재 미국 대사에 임명됐다. 2기 행정부가 시작되던 1997년 국무장관에 올랐다. 인준 투표에서 초당적으로 만장일치 지지를 받았다.

올브라이트는 군사 개입을 주저하던 클린턴 정부에서 ‘미국의 힘’을 강조한 강경주의자로 꼽혔다. 1999년 코소보 내전 종식을 위해 군사 개입이 필요하다고 백악관을 설득했다. 핵 확산 억제에도 앞장섰다. 2000년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회동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고위급 교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평양까지 찾았지만 끝내 해결하지는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취임 후인 2018년 저서 《파시즘》을 통해 북한을 ‘세속적 ISIS(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로 불렀다.

그의 별세 소식에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는 세계 자유를 수호하고 억압 속에서 고통받던 사람을 위로했다”며 “‘미국이 없어선 안 될 나라’라던 그의 신념을 늘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고 다른 이들이 이를 실현하도록 도왔다”고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고인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을 위한 열정적인 힘이었다”고 추모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