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단군서 현대까지…日학자가 본 한국의 사상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를 접한 뒤 380쪽이 넘는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두꺼운 책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긴 시간, 많은 인물을 다루기에 불충분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아울러 중요한 인물이나 사상들이 고루 다뤄졌다고 여겨지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단번에 눈길을 끄는 점 또한 이처럼 장구한 역사와 수많은 인물을 다룬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무언가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이의 비망록처럼 숱한 인물들의 이름을 빼곡히 담아낸다.

[책마을] 단군서 현대까지…日학자가 본 한국의 사상
두서없이 나열하자면 단군, 김일성, 서경덕, 노무현, 장일순, 이돈화, 나철, 박정희, 임화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 책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너무 많은 이들이 등장하는 점도 특이하지만 이토록 결이 다른 이들이 함께 다뤄진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다. 한 권의 책에서, 더욱이 사상사라는 주제 아래 이들을 나란히 놓은 책은 아마도 처음인 듯하다.

이처럼 많은 인물, 게다가 삶의 행로가 달랐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조선사상사》가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제목의 ‘조선’은 고려시대 다음에 등장하는 조선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고조선에서 대한민국에 이르는 모든 역사시대를 싸잡아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긴 역사를 아우르다 보니 책에서 언급되는 인물이 당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오구라 기조가 말하는 ‘사상’은 유명한 학자의 생각만 가리키는 게 아니며 신화, 종교. 문학, 철학, 종교, 정치, 일상 등을 통해 드러나거나 영향력을 발휘했던 생각과 실천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 그토록 다양하며 이질적인 인물들이 함께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조선’시대만 다루는 책도 아니고 저명한 사상가만 다루는 책도 아니다. 뭇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하나의 역사를 만들며 한반도에서 피고 졌던 다양한 생각과 실천의 ‘뿌리’를 끈질기게 좇는 책이다. 따라서 지은이가 다루는 소재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단군 신화, 삼국시대의 문화와 정치, 고려의 불교, 조선 유학, 대한제국기 및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사상과 실천, 분단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 등 한국사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만 있으면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이 책이 잡다한 역사와 인물 이야기로 일관되리라고 지레짐작해선 곤란하다. 긴 시간, 여러 갈래를 통해 나타난 삶과 생각, 실천 속에서 조선사상사의 특징은 물론 그 근간을 더듬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오구라 기조는 ‘순수성’ ‘하이브리드성’ ‘정보’ ‘생명’ ‘영성’을 조선사상사의 특징으로 열거하는데, 비록 그 이름을 달리하곤 있지만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이 가운데 지은이는 특히 ‘영성’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는 듯하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상에 면면히 흐르는 바탕을 “조선적 영성”이라 정의하는 까닭이다.

대개 ‘영성’은 정신적인 무언가로 여겨지지만, 지은이가 말하는 ‘영성’의 의미는 이와 다르다. ‘영성’은 물질이나 육신과 대립하는 것, 따라서 존재의 불완전한 일부를 지칭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은 결코 추상적인 정신적 원리가 아니며, 모든 존재를 아우름과 동시에 그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바탕’이다. 말하자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사상은 철저히 어떤 원리에 바탕을 두면서도 생명을 비롯해 모든 존재를 아우르려 했고, 또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해왔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인 것이다.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부분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 여러 사상, 인물들이 균형 있게 다뤄지지 않음이 맘에 걸린다. 지은이의 관심 등에 따라 대단히 상세하게 언급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 한 줄로 그친 사례도 있다. 문제는 소략하게 다뤄진 사례가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동학을 소상하게 다룬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이에 비해 대종교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대종교가 유불선 통합이라는 ‘하이브리드성’을 명백하게 표출했고, 무장투쟁을 비롯해 항일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의미 있는 의문이 단번에 제기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책은 가치 있는 논지를 풍부하게 품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덧붙여, 같은 길을 가는 연구자로서 한국의 사상사에 대한 지은이의 열정과 애정은 고마울 뿐 아니라 건강하기 그지없는 자극으로 다가온다.

이병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