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매이리드 맥기네스 유럽연합(EU) 금융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이 2월 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천연가스와 원자력 발전에 대한 투자를 환경·기후 친화적인 지속가능한 금융 녹색분류체계(Green Taxonomy·택소노미)에 포함하는 규정안을 확정, 발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매이리드 맥기네스 유럽연합(EU) 금융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이 2월 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천연가스와 원자력 발전에 대한 투자를 환경·기후 친화적인 지속가능한 금융 녹색분류체계(Green Taxonomy·택소노미)에 포함하는 규정안을 확정, 발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원자력발전에 눈을 돌리고 있다. EU는 앞서 원전을 친환경에너지로 분류하는 ‘지속 가능한 금융 녹색분류체계(Taxonomy, 택소노미)’안을 확정했다. 여기에 지난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발(發) 에너지 수급 위기까지 더해지자 “원전의 효율성과 친환경 가능성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다.

원자력 르네상스 선언한 프랑스

대표적 국가가 유럽 최대 원자력 생산국인 프랑스다. 프랑스는 최근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풍력과 태양열 등 기존 재생에너지만으론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월 프랑스 동부 벨포르를 찾아 “2035년 첫 원자로 가동을 시작으로 신규 원자로 6기를 세울 것”이라며 “원자로 8기를 추가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2050년까지 프랑스에 들어서는 신규 원자로는 최대 14기다.

그는 “오늘은 프랑스가 그동안 원했던 원자력산업이 재탄생하는 순간”이라며 “거대한 원자력 모험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정책 방향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취지다.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원자력을 핵심으로 삼겠다고 밝힌 그는 “안전문제가 없다면 기존 원자로도 폐쇄하지 않겠다”고 했다.

프랑스 정부는 가동 연한이 40년인 기존 원자로 수명을 50년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신규 원자로 설립에 배정된 예산은 500억 유로(약 68조2600억원)다. 국영 전력기업 EDF는 2028년부터 기존 원자력발전소 부지에서 차세대 유럽형가압경수로(EPR) 건설 작업을 시작한다. 마크롱 대통령의 발표에 앞서 EDF는 제너럴일렉트릭(GE)과 원자력 터빈 구매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5년 전 “원자력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오는 4월 대선을 앞두고 재선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면초가’ 유럽 원자력산업, 되살아난다

프랑스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67.2%를 원자력에 의존한다. 현재 가동 중인 원자로는 56기로, 미국(93기)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원자력이 국가 3대 산업 중 하나인 곳이기도 하다. 이런 프랑스가 ‘원자력 르네상스’를 주창한다고 해서 유럽에서 큰 변화가 감지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이는 프랑스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EU 전문 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최근 ‘사면초가에 빠졌던 유럽 원자력산업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탄소제로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자력발전과 같은) 기술중립적 접근 방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유럽 원전업계의 생사를 가르는 중요 이정표로 EU 택소노미를 꼽았다. 올 초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가 EU 택소노미를 확정해 원전 투자가 친환경 금융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놨기 때문이다.

확정안에 따르면, 신규 원전 투자가 친환경 활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된다. 투자 대상이 될 신규 원전은 2045년 전에 건축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은 2040년까지 승인이 필요하다. 신규 원전을 짓는 EU 회원국은 2050년까지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세부 계획을 세워야 한다.

EU는 앞으로 회원국들과 EU 의회에서의 논의를 거쳐 승인을 받은 뒤 내년 1월부터 EU 택소노미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EU의 27개 회원국 중 20개국 이상(EU 인구의 65% 이상을 대표), EU 의회에서 절반(353명) 이상이 반대하면 부결된다. 프랑스를 비롯해 폴란드, 핀란드, 체코 등이 확정안을 지지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 일부 회원국이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대세가 뒤바뀌진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脫러시아 여론으로... 원전 부활 조짐 ‘가속화‘

러시아의 개전 이후 원유, 천연가스 등 국제 에너지 시장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위태로워졌다. 그중에서도 천연가스의 40%와 원유의 25%가량을 러시아산 수입에 의존하는 유럽 상황은 심각하다. 코로나19 이후 경기가 회복하면서 연일 물가상승을 자극하고 있는데, 최근엔 에너지 가격까지 치솟자 민심이 들끓고 있다.

지난 수년간 원전을 기피했던 유럽 국가들이 하나둘 돌아서기 시작했다. 독일과 함께 탈원전에 앞장섰던 벨기에와 20년 넘게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이 대표적이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벨기에가 원전 수명을 늘리고,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했던 계획을 연기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벨기에는 지난해 12월 2025년까지 원전 7기를 모두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에너지 공급이 불안정하다고 판단될 경우 원전 2기의 수명은 연장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이후 두 달 사이에 러시아가 벌인 전쟁으로 에너지 위기가 촉발하자, 결국 원전 수명을 10년 더 연장하겠다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최근 원전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신규 원전을 건설하고 영국의 에너지 수요에서 원자력 비중을 현재보다 높이겠다”고 밝혔다. 영국 전력 수요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현재 약 15%)을 2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영국 정부는 탈탄소 전략의 일환으로 원전을 택했다. 지난해 이미 사이즈웰C 신규 원전 건설에 17억 파운드(약 2조7000억원)를 투입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최근엔 기존의 사이즈웰B 원전 수명을 20년 늘려 2055년까지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영국 기업에너지산업전략부(BEIS)는 “대규모 원전은 지속적으로 저탄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라며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와 변동성이 극심한 글로벌 가스 가격에 취약한 점을 줄이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핀란드에서는 40년 만에 첫 원전인 올킬루오토 3호기가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동유럽에서는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이 없는 폴란드가 석탄 화력발전 대신 발전용량이 최대 9GW에 달하는 새로운 원전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루마니아도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소형 원자로(SMR)를 건설할 계획이다. 체코는 최근 남부 두코바니 지역에 신규 원전 1기를 짓기 위한 본입찰을 개시했다.
김리안 한국경제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