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인문학자가 내면까지 살펴 쓴 '능호관 이인상 연보' 출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20년 넘게 이인상 연구 매달린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집필
방대한 주석·색인 수록…"연보는 독자적이고 독특한 인간학 보고" 조선 후기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1710∼1760)을 20년 넘게 연구해 호평을 받은 탁월한 저작을 잇달아 발표했던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인상 연보를 발간했다.
이인상은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1585∼1657)의 후손이자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서얼이었다.
벼슬은 종6품 관직인 찰방에 그쳤으나, 학식과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전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에서 총 2천300여 쪽에 이인상이 남긴 회화 64점, 서예 127점 등을 상세하고 깊이 있게 분석한 저자는 돌베개가 펴낸 신간 '능호관 이인상 연보'에서도 기존 연보와는 차별화된 집필을 시도했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그동안 좁은 시야로 특정 분야만 파고드는 학문보다는 분과의 벽을 허무는 '통합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시인, 산문가, 화가, 서예가였던 이인상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이었다.
연보(年譜)는 사람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겪은 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오늘날은 전기나 평전 뒤쪽에 실리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2000년 이후에는 이규보, 이황, 허균, 정약용 연보가 간행됐다.
연보는 '사실'을 나열한 책인 만큼 인물에 대한 엄밀한 고증이 수반돼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점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인 행장(行狀)이나 비평을 가미한 전기인 평전과 연보는 엄연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연보는 공적·학문적 저술로, 반드시 연대순으로 기술해야 하나 행장은 그렇지 않다"며 "연보는 평전처럼 서술자의 이념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고, 평전보다 더 '역사'에 근접해 있다"고 강조한다.
연보 기술은 언제나 '사실'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저자는 이인상 연보에서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풍경까지 다루고자 했다.
그는 "주체는 내면과 외면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단순히 외적 행위만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며 서간, 일기, 시, 산문을 분석하면 인물의 고뇌, 심리, 감정, 미적 지향, 이념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인상 연보의 또 다른 특징은 이인상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어울린 지식인 집단인 단호(丹壺) 그룹 활동도 조명했다는 점이다.
단호 그룹에 속한 인물로는 이윤영, 송문흠, 오찬, 윤면동, 김순택 등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인상의 문학적·예술적·이념적 자아는 단호 그룹 멤버들과의 교유(交遊) 속에서 형성되고 확장됐다"며 "이인상과 단호 그룹 인물들을 따라가며 18세기 전·중기 조선의 '시대정신' 추이를 탐색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인상은 아내의 지적 능력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다는 점을 고려해 이인상 집안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최대한 기술했다"며 젠더적 시각에 유의해 쓴 이인상 연보가 기존의 남성 위주 연보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인상 연보는 이인상이 태어난 '숙종 36년(1710년) 1세'로 시작해 박규수가 이인상 그림의 족자에 글을 쓴 '고종 13년(1876년) 사후 116년'으로 끝난다.
본문은 네 개의 층위로 나눠 기술했다.
첫 번째 층위에서는 이인상과 가족들이 경험한 일과 이인상이 관계한 인물을 언급했다.
두 번째 층위에는 단호 그룹을 포함해 이인상이 교류한 인물의 행위 중 이인상과 관련이 없는 정보를 정리했다.
정선·홍대용·박지원 등 동시대 활동한 인물의 행위는 세 번째 층위, 중국과 일본의 주요 인물 행적은 네 번째 층위에 수록했다.
본문 아래에는 풍부한 각주를 달았다.
심지어 주석이 본문보다 많은 쪽도 있다.
예컨대 "이인상이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다"는 문장 아래에는 이전에 다른 학자들이 논문에서 이인상 출신지를 양주라고 한 것은 착오라는 주석을 달았다.
뒷부분에는 인물, 땅, 책, 시문, 서화 등 항목별 색인을 만들어 실었다.
색인 분량만 76쪽이다.
이처럼 내용과 형식 면에서 충실한 연보를 완성한 저자는 머리말에서 "연보는 단지 보조적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자적이며 독특한 '인간학'적 보고(報告)이며 지적 건축물에 해당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한국의 예능의 힘은 누가 봐도 엄청나지만, 인문학이 지닌 학문의 힘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다"며 "연구자가 저마다 관심을 둔 인물의 연보를 작성한다면 한국학의 학문적 기초는 더 탄탄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저자는 초벌 번역을 마친 '뇌상관고'(雷象觀藁)가 출간되면 이인상 연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뇌상관고는 저자가 이미 번역을 마친 이인상 문집 '능호집'(凌壺集)의 초본으로, 분량이 3배쯤 된다.
박 교수는 28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앞으로도 분과에 구애되지 않는 연구를 통해 학계의 틈을 메우는 작업을 하고 싶다"며 "사상사는 동학과 만해 한용운 같은 근대사상, 예술사는 추사 김정희를 다룰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586쪽. 6만원.
/연합뉴스
방대한 주석·색인 수록…"연보는 독자적이고 독특한 인간학 보고" 조선 후기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1710∼1760)을 20년 넘게 연구해 호평을 받은 탁월한 저작을 잇달아 발표했던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인상 연보를 발간했다.
이인상은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1585∼1657)의 후손이자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서얼이었다.
벼슬은 종6품 관직인 찰방에 그쳤으나, 학식과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전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에서 총 2천300여 쪽에 이인상이 남긴 회화 64점, 서예 127점 등을 상세하고 깊이 있게 분석한 저자는 돌베개가 펴낸 신간 '능호관 이인상 연보'에서도 기존 연보와는 차별화된 집필을 시도했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그동안 좁은 시야로 특정 분야만 파고드는 학문보다는 분과의 벽을 허무는 '통합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시인, 산문가, 화가, 서예가였던 이인상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이었다.
연보(年譜)는 사람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겪은 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오늘날은 전기나 평전 뒤쪽에 실리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2000년 이후에는 이규보, 이황, 허균, 정약용 연보가 간행됐다.
연보는 '사실'을 나열한 책인 만큼 인물에 대한 엄밀한 고증이 수반돼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점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인 행장(行狀)이나 비평을 가미한 전기인 평전과 연보는 엄연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연보는 공적·학문적 저술로, 반드시 연대순으로 기술해야 하나 행장은 그렇지 않다"며 "연보는 평전처럼 서술자의 이념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고, 평전보다 더 '역사'에 근접해 있다"고 강조한다.
연보 기술은 언제나 '사실'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저자는 이인상 연보에서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풍경까지 다루고자 했다.
그는 "주체는 내면과 외면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단순히 외적 행위만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며 서간, 일기, 시, 산문을 분석하면 인물의 고뇌, 심리, 감정, 미적 지향, 이념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인상 연보의 또 다른 특징은 이인상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어울린 지식인 집단인 단호(丹壺) 그룹 활동도 조명했다는 점이다.
단호 그룹에 속한 인물로는 이윤영, 송문흠, 오찬, 윤면동, 김순택 등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인상의 문학적·예술적·이념적 자아는 단호 그룹 멤버들과의 교유(交遊) 속에서 형성되고 확장됐다"며 "이인상과 단호 그룹 인물들을 따라가며 18세기 전·중기 조선의 '시대정신' 추이를 탐색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인상은 아내의 지적 능력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다는 점을 고려해 이인상 집안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최대한 기술했다"며 젠더적 시각에 유의해 쓴 이인상 연보가 기존의 남성 위주 연보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인상 연보는 이인상이 태어난 '숙종 36년(1710년) 1세'로 시작해 박규수가 이인상 그림의 족자에 글을 쓴 '고종 13년(1876년) 사후 116년'으로 끝난다.
본문은 네 개의 층위로 나눠 기술했다.
첫 번째 층위에서는 이인상과 가족들이 경험한 일과 이인상이 관계한 인물을 언급했다.
두 번째 층위에는 단호 그룹을 포함해 이인상이 교류한 인물의 행위 중 이인상과 관련이 없는 정보를 정리했다.
정선·홍대용·박지원 등 동시대 활동한 인물의 행위는 세 번째 층위, 중국과 일본의 주요 인물 행적은 네 번째 층위에 수록했다.
본문 아래에는 풍부한 각주를 달았다.
심지어 주석이 본문보다 많은 쪽도 있다.
예컨대 "이인상이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다"는 문장 아래에는 이전에 다른 학자들이 논문에서 이인상 출신지를 양주라고 한 것은 착오라는 주석을 달았다.
뒷부분에는 인물, 땅, 책, 시문, 서화 등 항목별 색인을 만들어 실었다.
색인 분량만 76쪽이다.
이처럼 내용과 형식 면에서 충실한 연보를 완성한 저자는 머리말에서 "연보는 단지 보조적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자적이며 독특한 '인간학'적 보고(報告)이며 지적 건축물에 해당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한국의 예능의 힘은 누가 봐도 엄청나지만, 인문학이 지닌 학문의 힘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다"며 "연구자가 저마다 관심을 둔 인물의 연보를 작성한다면 한국학의 학문적 기초는 더 탄탄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저자는 초벌 번역을 마친 '뇌상관고'(雷象觀藁)가 출간되면 이인상 연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뇌상관고는 저자가 이미 번역을 마친 이인상 문집 '능호집'(凌壺集)의 초본으로, 분량이 3배쯤 된다.
박 교수는 28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앞으로도 분과에 구애되지 않는 연구를 통해 학계의 틈을 메우는 작업을 하고 싶다"며 "사상사는 동학과 만해 한용운 같은 근대사상, 예술사는 추사 김정희를 다룰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586쪽. 6만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