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공기업 사장 "험악한 분위기에 눈치껏 사임"
재수사는 흐지부지 무혐의 처분 종결
산업부 공기업도 줄사표 압박 정황…"자원외교 재수사의뢰로 여론조성"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미 검찰 수사를 거쳤던 자원외교 비리를 다시 수사의뢰하면서 산하 공기업 사장단에게 사퇴를 종용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산업부가 산하 발전사 사장단뿐 아니라 공기업 사장들까지 적폐청산을 구실로 물갈이를 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부 부처 차원의 수사의뢰가 사표 수리를 위한 여론조성 수단이 아니었느냐는 의혹까지 낳고 있다.

30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산업부가 201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부실 자원외교 비리'와 관련해 검찰에 재수사를 의뢰한 후 산하 에너지공기업 사장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당시 사임한 공기업 사장단 중 한 명인 A씨는 연합뉴스 통화에서 그때 산업부가 자원외교 관련 수사를 의뢰한 후 한 달 만에 사표를 냈다고 언급한 뒤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MB 정부에서 자원개발과 원자력 분야의 책임자로서 업무를 수행했던 A씨는 "당시 수사 의뢰를 해 우리를 적폐로 규정해서 청산한다고 했었다"며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떠올렸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자원외교'는 당시 비리와 부실 투자로 논란이 됐고 시민단체와 감사원의 고발에 따라 2015년 관련 공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부실투자의 책임소재를 찾아 전 석유공사 사장과 광물자원공사 사장을 기소했으나 최종적으로 법원은 모두 무죄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산업부는 3년여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의혹이 나왔다며 석유공사·광물자원공사·가스공사에 대한 재수사를 의뢰했다.

자체적으로 꾸린 '해외자원개발 혁신 TF'가 자원개발 사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해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부실 의혹을 발견했다는 이유였다.

이 같은 경위로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의 자원외교에 대한 여론이 다시 악화했고, A씨는 그런 분위기가 사표를 쓰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 외에도 임기가 최소 6개월 이상, 많게는 1년 9개월까지 남아있었던 공기업 사장 3명이 A씨와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사표를 썼다.

A씨는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깨끗하게 사표를 내고, 만약 사표가 수리되면 '현 정부와는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발전 자회사 4곳의 사장들처럼 직접 산업부 관계자로부터 사표를 제출하라는 말을 듣진 못했으나 직속 상급기관인 산업부 내 분위기를 고려해 '눈치껏' 사표를 냈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당시 산업부의 재수사 의뢰가 실체 규명보다는 이른바 적폐청산 여론 조성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냐는 의심 섞인 시각도 나온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에 배당된 재수사 의뢰 사건과 관련해 자원외교 책임자가 새로 처벌된 사례는 여태껏 나오지 않았다.

A씨는 당시 재수사와 관련, "박근혜 정부 때 검찰에서 다 조사도 하고 혐의가 없는 걸로 결론 난 사안이었다.

근데 현 정부 들어 검찰을 동원해 다시 다 꺼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최형원 부장검사)가 지난 28일 산업부 산하 광물·에너지 관련 공기업 4곳의 기획 및 전략 담당 부서를 압수수색한 데에는 이처럼 산하 기관장들의 사표 제출 과정에 부당한 강요나 종용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검찰이 압수물 분석을 마치고 관련자 소환 조사를 본격화하면 2018년 산업부의 재수사의뢰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건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정부가 산하기관 인사에 대해 부당한 사퇴 종용을 했다는 증거가 확보된다면 새 정부 출범 전이라도 정부 고위직 인사에 대한 기소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