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대표. 엔비디아 제공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대표. 엔비디아 제공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용 '핵심 칩'의 위탁 생산을 TSMC에 맡겼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아키텍처인 호퍼가 적용된 H100 GPU(그래픽처리장치) 물량이 TSMC로 간 것이다. 엔비디아 차세대 칩 수주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진검승부가 TSMC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 파운드리에 대한 위기설이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 "재도약의 기회로 삼아야한다"는 평가와 분석이 나온다.

'made by TSMC 4nm' 홍보한 엔비디아

엔비디아는 지난 21~24일 일정으로 열린 'GTC 2022' 행사에서 H100 GPU를 공개하며 "TSMC 4nm(나노미터, 10억분의 1m) 공정에서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팹리스가 칩을 소개할 때 '4nm 공정' '5nm 공정' 등이란 문구를 통해 성능을 홍보하는 경우는 많지만 위탁생산한 파운드리를 대놓고 공개하는 건 흔치 않은 일로 평가된다. 엔비디아가 'made by TSMC'를 칩의 고성능을 보장하는 마케팅 전략처럼 활용한 것이다

엔비디아는 그동안 데이터센터용 GPU를 TSMC 7nm 공정에서 생산했다. 이번 H100 GPU는 인공지능(AI) 연산 등에 적합한 슈퍼컴퓨터 맞춤형 칩이다. 데이터센터용 GPU 위탁생산 경험이 있는 TSMC의 우세가 점쳐졌다. 예상대로 TSMC로 갔다.

관건은 소비자들이 주로 쓰는 엔비디아 '지포스 RTX' 40 시리즈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GPU 칩이다. 엔비디아는 전 모델인 지포스 RTX 30 시리즈에 들어갔던 암페어 아키텍처의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삼성전자 8nm 공정에 맡겼다. 이를 감안하면 올해 3분기 출시 예정인 RTX 40 시리즈에 들어가는 GPU도 삼성전자에 맡기는 게 정상이다.
엔비디아 H100 GPU
엔비디아 H100 GPU
하지만 반도체업계에선 엔비디아가 이번엔 RTX용 GPU도 TSMC에 맡겼다는 분석이 계속 나온다. 원활한 생산을 위해 TSMC에 90억달러 규모 웃돈을 주고 생산라인을 확보했다는 뉴스도 보도됐다. 최근 삼성전자의 5nm 이하 공정에 대한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양품의 비율)이 30~40%로 TSMC의 절반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TSMC의 RTX 40 시리즈용 GPU 수주가 사실처럼 얘기되고 있다.

젠슨 황 "삼성전자도 훌륭하지만..."

TSMC를 선호하는 이유가 뭘까.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CEO(대표)맡고 있는 젠슨 황은 이번 행사 브리핑에서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파운드리 업체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이같은 말로 대신했다.
TSMC는 현재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업체입니다. 삼성전자도 훌륭합니다. 우리는 두 업체와 함께 일했습니다(TSMC of course, is still by far the still the best best provider in the world and best foundry in the world. Samsung is excellent as well, and we've worked with both of them).
협력사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젠슨 황은 TSMC와 삼성전자도 함께 언급하긴 했다. 하지만 수식어구를 보면 두 회사에 대한 평가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젠슨 황의 말마따나 팹리스들이 '최고의 파운드리'인 TSMC에 생산을 맡기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격동의 파운드리 시장

파운드리 시장 환경을 보면 '격동의 시기'라고해도 무방하다. TSMC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고 있다. UMC, 글로벌파운드리 등 세컨티어(2nd tier)업체들은 각각의 강점을 바탕으로 고객 기반을 공고하게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는 인텔마저 파운드리에 눈독을 들이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인텔은 2025년부터는 2nm 공정에서 양산을 시작할 것이라며 본격적인 기술 경쟁을 예고했다. 미국 기업이란 간판을 앞세워 정부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미 퀄컴 등 미국 팹리스 고객사까지 확보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파운드리 시장에서 첨단, 레거시 공정 가리지 않고 공급보다 수요가 큰 상황이란 것이다. 대다수 파운드리업체는 현재 1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부 고객사를 잃더라도 올해 실적에는 당장 큰 타격은 없다는 이야기다.
파운드리 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팻 겔싱어 인텔 CEO
파운드리 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팻 겔싱어 인텔 CEO
게다가 애플처럼 상당한 물량을 맡길 수 있는 '큰 손'이 아닌 이상 주요 팹리스들은 TSMC에 100% 칩을 맡기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팹리스 입장에서도 TSMC에 100% 의존할 경우 가격 협상 테이블에서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 최첨단 공정의 수율이 좋든 안 좋든, 삼성전자 파운드리와의 협력 관계를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일정 물량은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젠슨 황도 "엔비디아는 다양한 업체들의 16nm 12nm 8nm 7nm 등 다양한 공정에서 제품을 양산한다"며 "복수밴더 전략을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퀄컴 역시 실적설명회에서 "(TSMC와 삼성전자로) 공급처를 다변화했기 때문에 공급망 혼란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강조했다.

기술경쟁은 좋지만 숫자에 집착 말아야

정리하면 시장에서 나오는 얘기처럼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최첨단공정 수율이 30%대라면, 좋지 않은 상황인 건 맞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분위기다. 경계현 삼성전자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사장)은 최근 주주총회에서 "5nm 이하 공정은 반도체 소자의 물리적 한계에 근접해 초기 램프업(양산)에 시간이 소요가 됐다"며 "하지만 점진적으로 수율을 개선해 안정화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9년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파운드리 세계 1등을 달성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안정적인 2등'만 계속 유지해도 상당한 성과라는 분석도 무시할 수 없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30년 이상 파운드리 한우물을 파 완벽한 수준의 생태계를 구축한 TSMC와 2010년대 들어 파운드리 서비스를 본격화한 삼성전자와의 대등한 경쟁은 '처음부터 승자가 정해진 싸움'이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인텔의 진출로 안정적인 2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큰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TSMC와 5nm, 3nm, 2nm 등의 '숫자'에 대한 경쟁을 지양하고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만드는 게 어떨까.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이 최근 3~4년 간 급하게 달려온만큼 '재정비'의 시간도 필요해보인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지금 같은 상황에 딱 필요한 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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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