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 보렐 델 카소의 '비평으로부터의 탈출'(1874). 스페인 마드리드은행이 소장한 작품이다.
페레 보렐 델 카소의 '비평으로부터의 탈출'(1874). 스페인 마드리드은행이 소장한 작품이다.
통일신라시대 화가 솔거는 ‘그림 신(神)’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찬사를 받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지금은 솔거의 작품이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지만 《삼국사기》에는 그가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솔거가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는데, 줄기는 비늘 같은 인준으로 그리고 가지와 잎은 꼬불꼬불하게 표현해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이따금 이것을 멀리서 보고 날아들다가 급기야 돌아와서는 앉을 곳이 없어서 떨어지곤 했다. 세월이 지나 빛깔이 충충해지자 스님들이 단청으로 보수했더니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

새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일 만큼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솔거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명화를 소개한다. 스페인 화가 페레 보렐 델 카소(1835~1910)의 대표작 ‘비평으로부터의 탈출’(1874)이다.

그림은 한 소년이 어두운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는 긴장된 순간을 포착했다. 소년은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겁에 질린 두 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소년의 표정과 상의가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어깨와 가슴, 절박한 몸동작에서 탈출 순간의 긴박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실내공간이 그림 속 세계이고 창틀은 사각형 액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화가가 그림을 감옥에 비유한 의도는 무엇이며 소년은 왜 그림 속에서 바깥세상으로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을까? 2차원 평면인 캔버스에서 실제 사람이 튀어나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런 입체적이고 기발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림 속에서 도망치는 소년은 화가 자신이며 액자는 그의 작품세계를 비난했던 비평가 집단을 상징한다. 당시 델 카소는 트롱프뢰유 기법의 대가인데도 평단의 혹평을 받고 있었다. 프랑스어로 ‘눈속임’을 의미하는 트롱프뢰유는 대상을 3차원 입체처럼 보이도록 묘사하는 회화기법을 뜻한다. 기원전 7세기부터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회화에서 다양하게 활용해왔다.

페레 보렐 델 카소의 1901년작 ‘자화상’.
페레 보렐 델 카소의 1901년작 ‘자화상’.
델 카소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관객에게 즐거움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트롱프뢰유가 인기를 끌었다. 전문 화가도 적지 않았다. 트롱프뢰유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의 예술비평가 셀린 들라보에 따르면 눈속임 기법에는 미술가의 상상력뿐만 아니라 기술적 능력과 학술적 지식이 동원된다. 눈속임 기법을 이용한 작품은 화가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시각을 통한 지각 활동이라는 관람객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델 카소는 원근감, 명암, 광학, 가상효과를 사용한 트롱프뢰유 기법을 회화에 적용한 대표적인 화가였다. 2차원 평면 그림이 아니라 마치 3차원 입체 이미지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델 카소의 트롱프뢰유는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과 달리 평단에서는 조롱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트롱프뢰유가 단지 관객의 눈을 교묘하게 속이는 잔재주를 부리는 기술이며, 재미만을 노린 장난스러운 하위 장르 그림에 불과하다고 멸시했다.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부응하는 시대적 변화도 트롱프뢰유를 대하는 비평가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1839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술로 현실 세계를 화폭에 복제하는 능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다. 화가가 아니라 사진기의 렌즈가 현실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일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이 위대한 화가의 증표라는 인식도 점차 바뀌었다. 19세기 이후 미술에서 개성적 표현력과 시대정신이 중시되면서 실물 같은 효과를 주는 트롱프뢰유는 평단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델 카소는 단지 눈속임용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평단의 비난 때문에 창작 의욕마저 상실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기존 가치관의 붕괴로 갈등을 겪던 그의 절박한 심정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소년의 모습에 투영됐다. 그림 속 세계는 델 카소의 예술관, 액자는 미술계의 기득권이 만든 오만과 편견의 견고한 벽을 상징하는 문화권력에 의한 검열을 의미한다.

'감옥 닮은 액자' 탈출하는 소년, 3D 이미지의 원조 '트롱프뢰유'
오늘날 이 작품은 트롱프뢰유 전문화가가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트롱프뢰유로 구현했다는 평가와 함께 해당 장르를 상징하는 그림이 됐다. 아울러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트롱프뢰유가 3차원 가상 이미지의 원조라는 정보도 알려준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