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서 채굴한 행복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플라톤도 와인을 마시며 철학적 사고를 숙성했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브라게토 와인을 즐겨 마셨다고 하니, 우리가 와인을 못 마실 까닭은 없다.
봄밤에 마시는 와인 한 잔은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을 남길 것이다. 꽃망울도 잠시 숨을 고르는 봄밤에 와인을 마시자. 포도와 와인의 신 오시리스가 살포시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와인의 광고 ‘파티’ 편(2020)은 여느 와인 광고와는 달리 컬러가 아닌 흑백 톤이다. 바람에 치마 자락을 날리며 걸어가는 여성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있다.
여성의 상체는 보이지 않고 옆모습만 보인다. 와인을 “파티에 완벽한 친구(Perfect company to a party)”라고 정의한 헤드라인에서 지금 파티 중이라는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보디카피는 휘갈겨 썼다. “매혹적인, 의심할 여지없는 품질은 뛰어난 멜랑쥬(mélange, 혼합)의 복합성과 조화로움 그리고 깊은 풍미를 약속합니다.”
마지막에는 “보르도 와인을 발견하라”는 슬로건으로 기대감을 유발했다.
프랑스 조르쥐 뒤뵈프(Georges Dubceuf) 와인의 광고 ‘자유’ 편(2015)에서는 디자이너의 솜씨로 광고의 완성도를 높였다. 마치 와인에 취한 남녀가 와인 잔에서 춤을 추는 듯 이채로운 장면이다.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와인을 따르는 순간을 재치 있게 표현하니 시각적 황홀감이 몰려온다. 보졸레 지역에서만 소비되던 보졸레 누보를 ‘그 해에 갓 생산된 와인을 마신다’는 가치를 담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사람은 보졸레 누보의 선구자 조르쥐 뒤뵈프였다.
“영혼이 자유로운 레드 와인(A free-spirited red wine)”이란 헤드라인처럼 광고의 분위기는 행복감이 넘쳐흐른다.
이탈리아 카르파노(Carpano) 와인의 광고 ‘건배’ 편(1949)은 ‘카르파노’ 와인과 ‘푼 테 메스’ 와인으로 건배하는 장면을 표현한 고전적 광고다.
카르파노는 아페리티프(aperitif, 식욕을 돋우려 식전에 애피타이저로 마시는 술)의 발명가인 안토니오 카르파노(Antonio B. Carpano, 1764-1815)가 만든 스위트 레드 와인이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서 나는 베르무트(베루뭇) 품종의 제왕과 같다. 푼 테 메스(Punt e mes, 절반(0.5)을 뜻함)는 여러 향료에서 우려낸 달콤한 향을 더해 여성 취향으로 만드는 버무스(vermouth) 와인으로 1870년부터 생산됐다.
이 광고는 이탈리아 광고의 왕으로 칭송받는 아르만도 테스타(Armando Testa, 1917-1992)가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칠레 산타 캐롤리나(Santa Carolina) 와인의 광고 ‘포도나무’ 편(2017)을 보면 포도 넝쿨이 산타 캐롤리나 카베르네 쇼비뇽 와인을 뱀처럼 칭칭 감고 있다.
칠레의 센트럴 밸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타 캐롤리나는 “이것이 칠레다(This is Chile)”란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와인 브랜드다. 캐롤리나 와인의 저장고가 현재 칠레의 기념물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세가 대단하다.
광고에서는 그런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몇 백 년은 됐을 법한 포도나무가 와인 병을 칭칭 감고 있는 장면을 표현했다. 처음부터 포도나무와 함께 와인 병이 자라다가 중간에 나무껍질이 뜯겨나간 것 같다. 브라질 산타크루즈 와인가게(Santa Cruz Wine Store)의 광고 ‘낭만 그 이상’ 시리즈(2014)에서는 초현실적으로 왜곡한 남녀의 모습을 판화 스타일로 표현했다.
모든 광고에 남녀가 등장해 각자의 몸에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카피를 새겨 넣었다. 모든 광고의 맨 아래쪽에는 이렇게 슬로건을 붙였다. “좋은 와인은 낭만 그 이상을 만듭니다(A great wine makes everything more romantic).”
첫 번째인 ‘가면’ 편을 보면 남녀가 각각 와인 잔을 들고 있다. 그런데 남자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고, 의자에 걸터앉은 여자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
카피는 이렇다. 여자가 “마스크를 썼더라면 더 멋있어 보였을 텐데.”하고 중얼거리자, 남자는 “나는 적당한 복장의 파티를 좋아해.”라고 응답한다. 여기에서 적당한 복장이란 약간은 노출된 옷을 뜻한다.
두 번째인 ‘목 아래쪽’ 편에서는 위치를 바꿔 남자가 의자에 걸터앉고 여자는 아래쪽에서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앞 광고에서 남자가 적당한 복장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반영한 듯 여자 옷이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노출 차림으로 바뀌었다.
이때 남자가 “목 아래쪽이 너무 사랑스러워.”하고 말하자, 여자는 “당신 말은 시처럼 느껴져.”라고 대답한다.
세 번째인 ‘포옹’ 편에서는 아예 의자를 치워버렸다. 어느새 둘이서 껴안은 채 몽롱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 남자가 “말을 안 할수록 당신은 더 예뻐.”하고 말하자, 여자는 “솔직함에 절대로 저항할 수 없네.”라고 대답한다.
남자가 왼 손으로 와인 잔과 여자의 얼굴을 동시에 감싸고, 오른 손으로는 다른 그 무엇을 하고 있는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표현했다.
네 번째인 ‘바보’ 편에서는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여자의 손을 쳐다보며 자신의 속내를 고백한다. “당신을 바보라 부르지만 가장 예뻐.”
가장 예쁘다는 말을 들은 여자는 쑥스러운 듯 다른 곳을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늘 알고 있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는 행복한 순간에도 이들 손에는 여전히 와인 잔이 들려있다. 와인 광고에는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와인처럼 숙성된 이야기가 녹아있다.
“와인 한 잔에는 맥주 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프랑스 속담처럼 와인 자체에도 숱한 이력과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와인 광고에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와인을 마시고 나면 함께 마신 사람과 마실 때의 느낌이 기억 창고에 저장되는 것 같다. 인문학적 맥락에서 와인을 연구한 장홍은 기억의 중요성을 이렇게 기술했다.
“책의 경우 혹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을 수도 있지만, 와인은 한번 마시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기에 어딘가 덧없고, 절박하고, 애잔하여 더욱 짜릿하다.”(장홍, 『와인 인문학 산책』, 글항아리, 2020, 274쪽).
그렇기에, 고급스런 잔에 마시지 않아도 그 순간의 와인은 기억된다. 소주잔이면 어떻고 그마저도 없을 때는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마시면 어떠랴. 누구와 함께 마시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사람들은 와인에 대해 다양하게 정의했다. 시인 보들레르에게는 ‘창조적 취기’를 주는 성스러운 양식이었고, 오펜바흐에게는 ‘뮤즈의 샘’이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플레밍은 “페니실린은 병을 낫게 하지만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은 와인”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와인을 탁자로 정의할 수 있다.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라는 뜻이다. 홀로 마시는 ‘혼술’은 위험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결국, 와인을 마실 때는 항상 누구와 함께 마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혼자서도 마실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와인을 마실 때 더 진한 행복감에 취하게 된다.
그래서 와인이란 사람이여 오라는 ‘와인(와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