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제공]
지난 7일 주한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를 찾기 위해 헬기에 오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경기도 평택으로 향하던 중 상공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봤다. 이는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윤 당선인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당선 전부터 반도체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만큼 업계는 정부 차원의 지원 강화를 요구하는 가운데 특히 일본의 반도체 몰락 사례를 반면 교사 삼아 인력 양성 및 기술 유출 방지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尹 당선인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의 심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검찰총장 시절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를 방문해 반도체 물리학자인 고(故)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2021.5.19/뉴스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검찰총장 시절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를 방문해 반도체 물리학자인 고(故)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2021.5.19/뉴스1
9일 정치권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배현진 당선인 대변인은 윤 당선인이 지난 7일 서울공항에서 캠프 험프리스로 헬기를 타고 이동하며 경로상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을 시찰했다고 전했다.

배 대변인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대해 "대한민국의 자랑", "세계 반도체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감탄했다. 이어 "반도체 산업 등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인 첨단 산업들을 더 발굴하고 세계 일류로 키워내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이날 윤 당선인의 시찰은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그가 먼저 제안했으며 상당 시간 상공에서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깜짝 시찰에서도 알 수 있듯 윤 당선인은 취임 전부터 반도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제시할 새 정부 주요 국정과제에 반도체 산업 육성 방안이 담길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윤 당선인은 국민의힘 입당 전인 지난해 5월 서울대 반도체연구소를 방문했고 대선 공약으로 '반도체 초강대국'을 만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미국의 자국 위주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고 대만 등 경쟁국은 정부 차원의 반도체 지원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경제안보 관점에서 반도체에 힘을 싣겠다는 게 윤 당선인의 구상이다.

지난달 30일에는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있는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터 총리와 통화하며 반도체 협력 확대를 제안했다. ASML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 굵직한 기업들이 ASML의 장비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윤 당선인이 뤼터 총리와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삼성전자의 첨단 장비 도입에도 숨통이 트이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반도체 우수 인재 육성 시급"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인수위 경제 2분과에 제출한 업무보고 자료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에 TSMC와 같은 '해외 선진업체 수준의 인프라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반도체 업계에선 인프라 지원 중 구체적으로 연간 1500명 수준의 신규 전문 인력을 원하고 있다. 현재 한해 반도체학과 졸업생은 650여명에 불과하다. 우수 인재 육성을 위해 대학 반도체학과 정원 확대가 필요한 이유다. 현재 수도권 대학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입학정원이 제한돼 있다.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사장은 지난달 열린 '반도체 투자활성화 간담회'에서 "반도체 고급인력이 양성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윤 당선인이 '반도체 및 지원기술 인력 10만명 양성'을 공약한 만큼 새 지원책에는 담길 것으로 기대 중이다.

반도체 업계가 인력 양성을 강조하고 나선 데는 일본의 전철을 밟아선 안된다는 위기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몰락 이유가 일본 내 우수 인력들이 한국과 중국 등으로 유출됐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일본에서 나와서다.
세계 3위 차량용 반도체 업체 일본 르네사스 [사진=르네사스 회사 홍보 영상 캡처]
세계 3위 차량용 반도체 업체 일본 르네사스 [사진=르네사스 회사 홍보 영상 캡처]
일본 주간지 '슈칸신초'의 인터넷판 데일리신초는 올 초 발간호에서 '인재 유출로 중국, 한국에 기술 새나갔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매체는 "과거 일본 반도체는 세계시장 절반을 점유했지만 지금은 10% 이하로 쪼그라들었다"며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대만 등으로의 인력 유출이 이런 참상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은 1976년부터 기술자 1000명 이상이 한국·대만 등으로 이직한 탓에 반도체 주도권을 뺏겼다고 판단하고 있다.

인력 양성과 함께 동시에 요구되는 사안이 기술 유출자에 대한 처벌 강화다. 지난달 말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 A직원이 반도체 핵심 기술 유출을 시도한 정황이 드러나 조사를 받았다. 핵심 분야의 기술 유출 시도는 국가적 손실을 불러오는 만큼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모습이다.

주요국들은 반도체 기술을 지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반도체 수출 시 국가 안보 허가를 받도록 했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은 첨단 기술 유출자를 2년 이하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경제안전보장 추진법 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TSMC를 보유한 대만 정부는 더 강력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대만 행정원은 지난 2월 국가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경제 부문 스파이 혐의를 받는 이들에 대해 최장 12년의 징역형과 약 43억원 수준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국가안전법과 양안관계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 곳간 열고 반도체 업계 대규모 지원 나서야"

정부 차원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도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가 경제 안보와 직결된 전략자산으로 인지되면서 각국 정부가 곳간을 열고 대규모 지원에 나서면서다. 미국 하원은 지난달 향후 5년 동안 반도체 관련 분야에 520억 달러를 투자하는 지원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2030년까지 유럽 내 반도체 공급을 늘리기 위해 430억 유로의 투자 계획인 'EU반도체칩법'을 발표했다.

반면 그동안 한국 정부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박했다는 평가가 많다. 반도체 기업이 국내에 시설투자를 할 때 최소 25%에서 최대 50%까지 세제혜택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최종 법안에는 최대 20%에 그쳤다. 이에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반도체 등의 국가전략기술에 대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20%, 중소기업 30%까지 확대해 달라고 인수위에 공식 건의했다.
반도체 칩을 손에 들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반도체 칩을 손에 들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로 반도체 설계와 생산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이 메모리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는 선전하고 있지만 팹리스에서는 경쟁력이 한참 모자라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1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17개 반도체 기업 중 전년 대비 매출이 50% 이상 증가한 4곳 모두 팹리스(퀄컴·엔비디아·미디어텍·AMD)다. 또 10대 팹리스 기업 중 퀄컴·엔비디아·브로드컴·AMD·마벨·자일링스 등 6곳은 미국 기업이며 미디어텍·노바텍·리얼텍·하이맥스 등 4곳은 대만 기업이다.

반면 국내 기업들의 팹리스 경쟁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옴디아에 따르면 전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로 미국(56.8%)·대만(20.7%)에 크게 못 미치며 중국(16.7%)과도 격차가 크다.

인수위 관계자는 "윤 당선인이 글로벌 반도체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고 반도체 패권의 중요성을 크게 인지하고 있다"며 "기존 경제적 측면에서만 접근했던 반도체 산업을 외교·안보적으로 확대해 포괄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가 가장 발달한 미국조차 백악관 주도로 관련 사안들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며 "삼성에만 맡길 게 아니라 일본 반도체 몰락을 반면교사 삼아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돼야 한다"고 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