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폐기해도 4~5년 뒤 일감 나오는데…그때까지 버틸지 막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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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업체 일감 완전히 끊겨
"지난달 공장 가동률 0%"
빚 내가며 버티고 있지만
인력 이탈 등 이미 한계상황
"지난달 공장 가동률 0%"
빚 내가며 버티고 있지만
인력 이탈 등 이미 한계상황
원전 제어봉 구동장치에 들어가는 부품을 0.1㎜ 단위로 정밀하게 깎아내던 기계는 1년 넘게 멈춰 있다. 작업으로 한창 시끄러워야 하는 공장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2003년 원전 부품 제조업을 시작한 영진테크윈은 지난달 처음으로 공장 가동률 0%를 찍었다. 그동안은 신고리 5·6호기에 들어가는 냉각펌프 등 잔여 일감 등으로 버텼지만 이젠 그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혹여 녹이 슬까 멈춰 선 설비에 기름칠만 반복하는 강성현 대표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지난 12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원전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원전 제조업체에 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원전 르네상스를 현실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구체적인 부활의 청사진조차 나오지 않아서다.
15일 원전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초 원자로 등 원전 주기기를 만드는 국내 유일 기업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는 협력회사들을 상대로 실태조사에 나섰다. 자금 상황과 인원 변동 여부, 신한울 3·4호기 원전공사 재개 시 부품 제작 가능성 등을 타진했다.
조사에 응한 원전 중소기업들은 자금 지원이 시급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이후 협력사 매출은 급감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협력사들과 맺은 원전 부품 납품 계약은 2016년 2836건에서 2019년 1105건으로 줄었다.
원전 중소기업들은 급감한 원전 부품 매출을 대체하기 위해 일반 산업기계나 제철 설비제조 등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선박기자재 같은 신사업을 찾아봤지만 여의찮은 상황이다. 최재형 삼부정밀 대표는 “정부 정책이 바뀌면서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원전 일감이 한꺼번에 사라져 현재는 제로(0) 상태”라고 전했다.
당장 원전 부품 제작 의뢰를 받아도 생태계 말단까지 피가 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제작에서 대금 결제까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여의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 원자재를 사고, 직원 고용을 유지하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금이 필요한데 대부분 중소기업은 체력이 바닥나 있다.
문찬수 인터뱅크 대표는 “두산에너빌리티에 납품하던 원전 설비 매출은 모두 날아갔고 기계 부품 설비업으로 버티지만, 작년 매출은 2017년의 절반 수준인 1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며 “은행 대출 등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원전 핵심 부품 20여 종을 두산에너빌리티에 단독 납품했던 세라정공도 해양플랜트 설비 등 다른 일로 메꿔서 연명했지만 2018년 적자 전환한 이후 매년 적자 폭이 커지고 있다.
초대형 복합 프로젝트인 원전산업이 신속한 턴어라운드가 쉽지 않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원전 하나가 건설되는 데는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경북 울진에 부지만 마련하고 2017년 공사가 중단된 신한울 3·4호기만 하더라도 2002년 5월 처음 예정 구역으로 지정된 뒤 20년 넘게 완공되지 못한 상태다.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재개하려 해도 다시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 공사 기간은 더욱 길어질 전망이다.
원전 중소기업인들은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일감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새 정부가 구체적인 청사진을 이른 시일 내에 내놓고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부터 적자를 보고 있다는 김곤재 세라정공 대표는 “지난 5년간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뀔 것이란 기대 하나로 빚을 내면서 버텨왔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발전설비업체 대표는 “지금부터 뭔가를 하려고 해도 최소 3~4년은 걸릴 것 같다”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희망 고문을 받는 상황이라 특단의 대책이 서둘러 나오길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조현갑 원자력산업협회 경영혁신처장도 “중소기업 지원 사업이 작년부터 시행되고는 있지만 건당 4000만~1억원 수준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며 “전문인력 채용을 위한 자금 지원을 확대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정부 차원의 미래 먹거리 청사진 마련이 시급하다”고 거들었다.
원전 건설에는 100만 개가 넘는 부품이 필요하다. 각 부품을 제조하는 수백 개의 중소기업은 오랜 세월 유기적으로 얽혀 공급망을 구성해왔다. 한두 개 업체만 쓰러져도 전체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원전산업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김진원/김병근 기자/창원=김해연 기자 jin1@hankyung.com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지난 12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원전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원전 제조업체에 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원전 르네상스를 현실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구체적인 부활의 청사진조차 나오지 않아서다.
15일 원전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초 원자로 등 원전 주기기를 만드는 국내 유일 기업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는 협력회사들을 상대로 실태조사에 나섰다. 자금 상황과 인원 변동 여부, 신한울 3·4호기 원전공사 재개 시 부품 제작 가능성 등을 타진했다.
조사에 응한 원전 중소기업들은 자금 지원이 시급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이후 협력사 매출은 급감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협력사들과 맺은 원전 부품 납품 계약은 2016년 2836건에서 2019년 1105건으로 줄었다.
원전 중소기업들은 급감한 원전 부품 매출을 대체하기 위해 일반 산업기계나 제철 설비제조 등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선박기자재 같은 신사업을 찾아봤지만 여의찮은 상황이다. 최재형 삼부정밀 대표는 “정부 정책이 바뀌면서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원전 일감이 한꺼번에 사라져 현재는 제로(0) 상태”라고 전했다.
당장 원전 부품 제작 의뢰를 받아도 생태계 말단까지 피가 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제작에서 대금 결제까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여의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 원자재를 사고, 직원 고용을 유지하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금이 필요한데 대부분 중소기업은 체력이 바닥나 있다.
문찬수 인터뱅크 대표는 “두산에너빌리티에 납품하던 원전 설비 매출은 모두 날아갔고 기계 부품 설비업으로 버티지만, 작년 매출은 2017년의 절반 수준인 1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며 “은행 대출 등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원전 핵심 부품 20여 종을 두산에너빌리티에 단독 납품했던 세라정공도 해양플랜트 설비 등 다른 일로 메꿔서 연명했지만 2018년 적자 전환한 이후 매년 적자 폭이 커지고 있다.
초대형 복합 프로젝트인 원전산업이 신속한 턴어라운드가 쉽지 않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원전 하나가 건설되는 데는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경북 울진에 부지만 마련하고 2017년 공사가 중단된 신한울 3·4호기만 하더라도 2002년 5월 처음 예정 구역으로 지정된 뒤 20년 넘게 완공되지 못한 상태다.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재개하려 해도 다시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 공사 기간은 더욱 길어질 전망이다.
원전 중소기업인들은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일감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새 정부가 구체적인 청사진을 이른 시일 내에 내놓고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부터 적자를 보고 있다는 김곤재 세라정공 대표는 “지난 5년간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뀔 것이란 기대 하나로 빚을 내면서 버텨왔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발전설비업체 대표는 “지금부터 뭔가를 하려고 해도 최소 3~4년은 걸릴 것 같다”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희망 고문을 받는 상황이라 특단의 대책이 서둘러 나오길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조현갑 원자력산업협회 경영혁신처장도 “중소기업 지원 사업이 작년부터 시행되고는 있지만 건당 4000만~1억원 수준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며 “전문인력 채용을 위한 자금 지원을 확대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정부 차원의 미래 먹거리 청사진 마련이 시급하다”고 거들었다.
원전 건설에는 100만 개가 넘는 부품이 필요하다. 각 부품을 제조하는 수백 개의 중소기업은 오랜 세월 유기적으로 얽혀 공급망을 구성해왔다. 한두 개 업체만 쓰러져도 전체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원전산업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김진원/김병근 기자/창원=김해연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