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들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로 인구감소와 함께 초인플레이션을 꼽는다. 막대한 군사비 등 과도한 비용지출에 따른 적자재정과 화폐가치 하락(데나리우스 은화 주조 남발)이 불러온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제 균열, 빈부격차가 로마를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오른팔’로 잘 알려진 찰리 멍거 부회장도 최근 이런 주장을 폈다.

CNBC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인플레이션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서 과도하면 문명을 망칠 수도 있다"며 "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원인도 인플레이션이었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이 불러오는 공포를 핵전쟁에 빗대기도 했다. 멍거 부회장은 '인플레이션은 핵전쟁을 제외하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기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미국의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보다 7.9% 상승해 4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한 데 이어 3월엔 상승률이 8.5%로 뛰었다.

◆물락 폭등에 탄핵당한 파키스탄 총리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원자재값 급등 여파로 세계 각국에 인플레이션 비상이 걸렸다. 특히 아시아 신흥국과 남미에서는 고물가가 촉발한 경제난이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 쇼크’가 일어나고 있다.

파키스탄 의회는 지난 10일 임란 칸 총리의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물가 폭등과 외환 위기 등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파키스탄에서 총리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물러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칸 총리가 축출된 지 하루 만에 정치 명문가 출신의 셰바즈 샤리프 전 펀자브 주총리가 새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세 차례 파키스탄 총리를 지낸 나와즈 샤리프의 동생이다. ‘친중’ 성향의 칸 전 총리는 자신의 불신임안 가결이 미국의 개입에 따른 것이라는 음모론을 펼치고 있어 정국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파키스탄의 대외 채무는 6월이면 1030억달러(약 127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달 기준 연간 물가상승률은 12.7%였다.

◆스리랑카에선 대통령 퇴진 시위

스리랑카는 코로나19에 따른 관광객 급감과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아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전력난에 석유, 식품, 의약품마저 동나자 수도 콜롬보 등지에서는 고타바야 라자팍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스리랑카의 통화가치(미국 달러화 대비 루피화)는 최근 한 달간 40% 가까이 급락했다. 외환보유액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스리랑카 중앙은행은 일시적인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스리랑카의 대외부채는 약 510억달러(약 62조9000억원)에 달하지만, 외환보유고는 3월 말 현재 19억3000만달러(약 2조3619억원)에 불과하다. JP모건체이스 등의 분석에 따르면 스리랑카가 올해 갚아야 할 대외 부채는 70억달러(약 8조5666억원), 5년간 갚아야 할 대외 빚은 250억달러(약 30조5950억원)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는 스리랑카의 국가 신용등급을 채무불이행(디폴트) 직전 수준까지 떨어뜨렸다. S&P는 스리랑카의 신용등급을 밑에서 세 번째인 'CC'로 강등하고 전망도 '부정적'으로 제시했다. 피치도 스리랑카의 등급을 디폴트 바로 위 단계인 'C'로 하향 조정했다.

◆페루는 반정부 시위 격화로 몸살

남미도 몸살을 앓고 있다. 페루에서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반발한 트럭 운전기사들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취임 9개월이 채 안 된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52)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연료와 비료, 식품 가격 등이 급등하자 트럭 기사와 농민들이 지난달 말부터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페루의 소비자가격은 연초 대비 6.82% 올랐다. 1998년 8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대선에서 박빙으로 승리해 지난해 7월 취임한 시골 교사 출신의 카스티요 대통령은 수난을 겪고 있다. 9개월 새 총리가 네 번이나 바뀌었고, 대통령 지지율은 급락했다. 자신과 측근의 연이은 부패 의혹 속에 카스티요 대통령은 지난해 말과 지난달 두 차례나 국회에서 탄핵 위기를 맞기도 했다.

30년 만에 가장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은 칠레에서도 지난달 취임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달만에 하락했다. 칠레의 3월 한 달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9%에 달했다. 1993년 이후 최고치다. 연간 물가 상승률은 9.4%로, 2008년 이후 최고치였다. 중앙은행의 목표치인 2∼4%를 크게 벗어났다.

◆50兆 코로나 추경 수정 불가피

신흥국들의 인플레이션 비상은 대외 요인에 따른 것이어서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원자재값 급등으로 촉발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는 미국 중앙은행(Fed)의 공격적인 금리인상(빅스텝)과 양적긴축 방침은 안전자산인 달러와 강세와 신흥국 통화 약세를 불러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가뜩이나 치솟은 수입물가가 더 뛰어오르며 물가를 밀어올릴 수밖에 없다. 신흥국만의 위기도 아니다. 세계 3위 경제대국인 일본도 엔화가치 급락과 함께 42년만에 경상수지 적자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으니 격세지감이다. 엔화 약세 속에 수입물가가 급등한 탓이다.

다음달 10일 출범할 윤석열 정부가 맞닥뜨린 가장 큰 과제도 물가 안정이다. 우리나라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년 만에 4%대로 치솟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물가를 포함한 민생안정 대책을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라"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지시했다. 당장 윤 당선인 1호 공약인 소상공인 손실보상을 위한 5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계획부터 구조조정을 해야 할 전망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가를 이기는 정권은 없었다.

이건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