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범석 소방관. 한경DB
고 김범석 소방관. 한경DB
고(故) 김범석 소방관은 2014년 6월 불과 3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6년 소방공무원에 임용된 뒤 8년 간 부산 119 구조대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화재 출동 270회 등 1000회 이상 구조 현장을 누빈 헌신적인 소방관이었습니다.

2013년 8월, 김 소방관은 훈련 도중 갑작스러운 고열과 호흡곤란을 겪었습니다. 3개월 뒤엔 ‘혈관육종암’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혈관육종암은 화재 현장 등에서 염화비닐 등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됐을 때 발병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질환입니다. 7개월 뒤 그는 숨을 거뒀습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2015년 6월 “김 소방관이 공무수행 중 병에 걸렸다는 근거가 없다”며 유족의 보상금 청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9년 9월에서야 법원은 “공무수행과 질병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유족 측 손을 들어줬습니다.

김 소방관은 근무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혈관육종암 진단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유족이 실제 보상을 받기까지는 5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질병 인과관계 입증, 본인·유족이 하라?

이처럼 보상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현행법이 공무상 재해를 입증할 책임을 국가가 아닌 공무원 본인이나 유족에 지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재해보상법 4조는 공무원이 공무상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경우 또는 그 부상 또는 질병으로 장해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를 공무상 재해로 규정합니다. 공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공무원은 요양과 재활, 간병 등에 필요한 급여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유족에 대해서도 연금이나 보상금 등이 주어집니다.
공무상 재해시 보상금 청구 절차
공무상 재해시 보상금 청구 절차
공무상 재해에는 ‘인과관계’라는 중요한 단서가 붙습니다. 즉 공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입증되어야만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누가 지는지 법상 명확한 규정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법원칙에 따르면 입증책임은 권리를 주장하는 당사자가 부담합니다. 이를 준용하면 공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재해를 입은 공무원 본인이나 유족 측이 부담해야 하는 셈입니다.

김범석 소방관 사례에서 보듯 혈관육종암 등 질병의 발병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의학 등 많은 전문지식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일개 개인인 공무원과 유족이 국가로부터 공무상 재해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해선 이런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에 대해 소방관들로 구성된 전국소방안전공무원노동조합(소방노조)은 “의학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없는 소방공무원과 유족들이 공무상 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소송을 통해 인정받거나 아예 신청을 포기하고 치료비 등을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며 “공무원 재해보상법에 ‘공상 추정 제도’를 신설해달라”고 정치권에 요구했습니다.

공상 추정 제도란 공무원이 업무 수행 중 재해를 겪을 경우 일단 공상으로 인정하고 인과관계 입증 책임은 국가가 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국가가 일단 보상하고 인과관계도 입증해야"

소방관 출신인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상 추정 도입을 골자로 한 공무원 재해보상법 개정안을 2020년 11월 처음 대표 발의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적용대상을 소방관으로 한정한 기존 법안의 문제점을 보완한 개정안을 다시 내놓았습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인 서영교 민주당 의원도 같은 달 공상 추정 도입과 보상·조사 절차 개선 등을 담은 공무원 재해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오영환 의원 발의 법안 내용
오영환 의원 발의 법안 내용
오 의원안은 공상 추정을 받을 수 있는 공무원을 ‘유해환경 또는 위험한 환경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 정의했습니다. 소방관은 물론 경찰과 우정사업본부 공무원(우체부) 등 다른 공무원에 대해서도 업무 성질에 따라 공상 추정에 따른 특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공무원 직종과 질병의 종류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국회에서 공상 추정 도입 논의는 한동안 지지부진했습니다. 우선 소관 부처인 인사혁신처가 도입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황서종 당시 인사혁신처장은 2021년 2월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산업재해나 의료소송 등은 굉장히 전문적인 판단을 요구하는데 입증책임은 대체로 청구인에 주어지고 있다”며 “(개정안은)체계 자체를 전체적으로 뒤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취지는 공감하지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황 처장의 발언은 공무원에 대해서는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특례를 부여할 경우 일반인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실제 공무상 질병과 유사한 개념인 ‘업무상 재해’를 규정하고 있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근로자에게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오영환 "상반기 중 법안 통과 기대"

소방관들을 중심으로 법 개정 요구가 이어지고 소방청도 해외 사례 등에 대한 연구용역결과를 내놓자 인사혁신처의 태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점차 바뀌었습니다.

행안위에 따르면 공상 추정 제도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에서도 운영 중입니다. 미국은 주마다 공상 추정을 받을 수 있는 질병의 종류나 요건을 세분화했습니다. 캐나다와 호주는 질병마다 공상 추정을 인정할 수 있는 소방관 최소 근무연수를 두고 있습니다.
사진=오영환 의원 SNS
사진=오영환 의원 SNS
오 의원은 “처음엔 정부가 난색을 표했지만 이후 입장변화가 있으면서 기존 법안의 문제점을 보완한 수정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행안위 관계자도 "정부가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법안 통과에 큰 걸림돌은 해결됐다"고 덧붙였습니다.

현재 법안에 대해 여야 간 특별한 이견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이 법안을 4월 국회 중점처리 법안으로 지정한 상황입니다. 오 의원은 “여러 정치현안이 있어 4월 내 처리는 어렵겠지만 상반기 중에는 통과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소방관 출신으로 동료 소방관들의 어려움을 몸소 느낀 오 의원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소방관을 비롯해 많은 공무원들이 오늘도 위험한 환경에서 묵묵히 국민의 안전한 일상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일하고 있다”며 “이번 법안이 통과돼 그들이 자부심을 갖고 본연의 직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