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연기금들이 국내 간판 기업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연기금들이 올해 주요 기업 주주총회에서 각종 안건에 반대표를 던진 비율이 2년 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외국 기관들이 국내 기업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입김 세진 글로벌 연기금…주총 안건 2개 중 1개는 반대했다

반대표 늘린 글로벌 연기금

18일 한국경제신문이 세계 최대 국부펀드로 꼽히는 노르웨이중앙은행투자관리청(NBIM)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국내 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정기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내역을 분석한 결과, NBIM이 반대표를 행사한 비율은 최근 2년 새 세 배 가까이 급증했다. NBIM은 국내 기업들이 상정한 전체 안건(주주제안 안건 제외)에 대해 2020년 주총에선 4.35%(391건 중 17건)만 반대했지만 올해 주총에선 반대 비율이 12.28%(391건 중 48건)에 달했다.

유럽 내 3위 연기금(운용자산 3142억달러)으로 꼽히는 네덜란드사회보장기금(PGGM)은 더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2020년과 올해 주총 의결권 행사 기록이 남아 있는 70개 종목을 분석한 결과, 이 기관의 반대표 행사 비중은 2020년 주총 때 20.4%(505건 중 103건)에서 올해는 47.89%(497건 중 238건)로 두 배 이상 뛰었다. 국내 기업이 올해 올린 주총 안건 중 절반 가까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캐나다연금(CPP), 네덜란드공적연금(ABP) 등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개하지 않지만 한국에 많이 투자하는 다른 외국계 연기금도 국내 기업 주총에서 갈수록 센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글로벌 연기금을 비롯해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이 반대표를 행사하는 비율이 부쩍 높아졌다”며 “국내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계 기관 목소리 더 커질 것”

글로벌 연기금들은 국내 기업 이사회의 독립성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 NBIM이 가장 많이 반대표를 던진 안건은 사외이사(20건) 및 사내이사 선임(12건)이었다. PGGM도 사외이사(50건)와 사내이사(42건) 선임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들 연기금은 기업 총수의 이사 선임에 회의적 시각을 보였다. 올해 NBIM과 PGGM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모두 반대했다. 이사회의 독립성 유지를 이유로 댔다. 2년 전 NBIM과 PGGM은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도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기업 감사위원 선임과 관련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다. NBIM은 올해 에스엠엔터테인먼트가 내세운 감사위원 후보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다. 주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를 댔다.

PGGM은 올해 재무제표 확정 안건에 가장 많은 반대표(59건)를 던졌다. 감사보고서를 늦게 제출한 것을 문제 삼았다. 삼성SDS는 주총 9일 전 감사보고서를 제출했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상법상 주총 1주일 전까지 감사보고서를 제출해도 되지만 더 빠르게 제출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국내 기업들은 발빠르게 대응하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머로우소달리에서 근무한 오다니엘 이사를 IR팀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오 부사장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와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에서 임원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삼성 안팎에선 오 부사장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에 대비해 주총 전략 수립 등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가에선 글로벌 연기금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개인투자자가 늘어나면서 한국에서도 주주 권리 강화 요구가 커졌고 외국인 투자자 역시 이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기업 대주주나 경영진이 주주 이익에 대해 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