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사회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그 은혜를 돌려줄 기회를 찾아다녔죠.”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공인재무분석사(CFA)인 신순규 브라운브러더스해리먼 애널리스트(사진)는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19일 한국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자선단체 ‘야나(YANA) 미니스트리’를 10년간 꾸려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야나는 오는 26일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신 애널리스트는 야나 관련 강연을 위해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2012년 지인들과 함께 세운 야나는 한국 아동양육시설(보육원)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미국 유학 프로그램(YSAP)을 비롯한 교육·자립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You Are Not Alone)’의 머리글자처럼 아동양육시설 아이들이 고립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한다. YSAP를 통해 지금까지 8명의 아동이 미국 가정에서 머물며 유학했다. 그중 한 명은 초등학생 때 신 애널리스트의 가족이 돼 어느덧 대학생이 됐다.

“한국에서 아동양육시설에 머무는 아이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했어요. 어려서 제게는 한국에 좋은 부모님이 계셨고, 미국 유학 시절에도 가족처럼 저를 품어준 분들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오로지 경제적 여건 때문에 교육 기회나 정서적 지지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요.”

그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응원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신 애널리스트는 만 9세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피아노 공연 중 오버브룩 맹학교의 초청을 받아 15세에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일반 고등학교로 진로를 바꾼 뒤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학, 조직학 박사 과정을 밟은 뒤 JP모간을 거쳐 세계적 투자은행 브라운브러더스해리먼에서 근무 중이다.

동양인 시각장애인으로서 월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 필요했을까. 그렇기에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안다. 신 애널리스트는 시각장애와 난독증 학생들에게 녹음교과서를 제공하는 ‘러닝 앨라이(Learning Ally)’ 이사도 맡고 있다.

그는 “장애만으로 한 사람의 정체성이나 가능성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장애인, 특히 시각장애인들은 직업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돼 있고, 그러다 보니 비장애인과 분리된 삶을 사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려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고등학교 양궁 수업 때 선생님은 저를 배제하는 대신에 저와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 함께 수업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자’고 하셨죠. 고심 끝에, 표적 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제가 활시위만 놓으면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그렇게 한다 해도 제가 활을 명중시킬 수는 없었지만, 활과 화살을 어떻게 쥐고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힐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와 친구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경험을 배울 수 있었어요.”

신 애널리스트는 민음사 계열 출판사 판미동에서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 두 권의 책을 낸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매주 블로그에 연재 중인 ‘월가에서 온 편지’도 책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매일 숫자와 씨름하는 직업에다 시각장애를 안고 있는 그가 꾸준히 글을 써온 원동력은 뭘까. 신 애널리스트는 “기업 분석에서 요구하는 감각이나 논의를 삶에도 연결할 수 있다”며 “우리가 건강한 투자를 위해 ‘견고한 기업’을 찾듯이 무엇이 견고한 삶인지를 글을 통해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