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내로남불' 자초하는 새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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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감동 없는 인사·인수위
정부 불신, 이미 위험수위 넘어
구조적 개혁 과제 추진 암담
신뢰의 사회적 자본 재건 못하면
네트워크 신산업에서 밀려나고
디지털 플랫폼 정부도 사상누각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정부 불신, 이미 위험수위 넘어
구조적 개혁 과제 추진 암담
신뢰의 사회적 자본 재건 못하면
네트워크 신산업에서 밀려나고
디지털 플랫폼 정부도 사상누각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정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목표와 비전을 정의할 능력이 없다”(지미 카터 연두교서, 1978년)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정부가 문제다”(로널드 레이건 취임사, 1981년) “큰 정부 시대는 끝났다”(빌 클린턴 연두교서, 1995년). 민주당과 공화당 할 것 없이 이들 미국 대통령은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을 경멸에 가까운 레토릭으로 쏟아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진 현실을 보여주는 발언이란 게 정치학자 마크 헤더링턴의 해석이다.
정부가 국민 모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느끼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정치적 신뢰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누군가의 희생 또는 양보를 필요로 하거나, 첨예한 갈등에 직면한 구조적 개혁과제들이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그 결과가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일 것이란 확신을 주는 높은 정치적 신뢰가 필요하다. 존 F 케네디가 ‘뉴 프런티어’를, 린든 존슨이 ‘위대한 사회’를 들고나왔을 때만 해도 정치적 신뢰가 높았다. 지금은 정치적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선거 공약 취지에 찬성해도 정부가 그것을 잘해낼 것이란 믿음이 없어 실제 정책 추진에는 반대한다는 사람 또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슬로건이나 비전을 제시해도 동력을 얻기 어렵다. 불신이 극에 달하면 이를 이용하는 극단적 지도자가 출현할 위험성도 높아진다.
로버트 퍼트넘은 미국이 정부 불신 등 위기의 ‘사회적 자본’을 재건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한다. 그래도 미국은 기본적으로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자본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패권국으로서 미국이 구축한 기존의 사회적 자본만으로도 앞으로 한참 버틸 수 있다는 주장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환경 변화에 따른 사회적 자본의 재건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정작 걱정되는 것은 불신을 자초하는 한국 정부의 현실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 슬로건이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다. 진영이 반씩 양분된 가운데 어느 정권이건 슬로건 따로, 현실 따로였다는 것을 경험해온 국민이 얼마나 감동받을지 의문이다. 인수위가 국정과제를 추리고 있다지만 공약과의 불일치가 적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벌써부터 들려온다. 선거 때 이기려면 무슨 공약을 못 하겠느냐고 둘러댄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능력 중심’이라고 말하는 인사도 그렇다. 능력을 과거의 경력으로 볼 것이냐, 미래를 새롭게 정의하고 개척하는 힘으로 볼 것이냐는 천지차이다. 진영을 반씩 쪼갤 때마다 인재풀도 능력도 반감된다. 새 정부의 인사도 인수위도 정부 불신을 깨는 감동이 전혀 없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을 20대 대통령으로 소환하는 타임 슬립 TV 영화가 주목받을 정도다.
정부 불신은 정권 실패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사회의 선진화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란 주장도 있고, 정치가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정치가 사회를 불신으로 몰아가는 데 문화가 미래지향적으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정부가 10m 앞도 보지 못하는 사회가 창의와 혁신으로 넘쳐날 가능성은 없다. 한국 관료는 5년 뒤 자신의 안위를 염두에 둔 전략적 선택으로 돌아선 지 오래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은 혁신의 인프라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지금의 미국 실리콘밸리가 그 좋은 보기다. 신뢰가 자신이 아는 사람과 조직, 정치적 진영에 국한되는 순간 네트워크 확장은 제한된다. 신뢰 관계가 외부로 확산되지 않는다. 신뢰 확산 없이 ‘오픈 이노베이션’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양성’과 ‘개방성’이 요구되지만 한국 정치는 정반대 방향의 질주를 멈출 줄 모른다.
각국이 선점하려는 신산업 패러다임의 특징은 ‘탈(脫)중앙화’와 ‘민주주의’다. 헬스케어만 해도 병원을 꼭 찾아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개인의 진단 결정권이 확대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메타버스, 블록체인, 암호화폐도 마찬가지다. 오픈 네트워크 경제에서 ‘프로토콜’에 대한 신뢰는 필수적이다. 저(低)신뢰 사회는 네트워크 신산업에서 승산이 없다. 사회를 불신의 늪에서 구하는 정치로 가지 않으면 ‘디지털 플랫폼 정부’도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정부가 국민 모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느끼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정치적 신뢰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누군가의 희생 또는 양보를 필요로 하거나, 첨예한 갈등에 직면한 구조적 개혁과제들이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그 결과가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일 것이란 확신을 주는 높은 정치적 신뢰가 필요하다. 존 F 케네디가 ‘뉴 프런티어’를, 린든 존슨이 ‘위대한 사회’를 들고나왔을 때만 해도 정치적 신뢰가 높았다. 지금은 정치적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선거 공약 취지에 찬성해도 정부가 그것을 잘해낼 것이란 믿음이 없어 실제 정책 추진에는 반대한다는 사람 또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슬로건이나 비전을 제시해도 동력을 얻기 어렵다. 불신이 극에 달하면 이를 이용하는 극단적 지도자가 출현할 위험성도 높아진다.
로버트 퍼트넘은 미국이 정부 불신 등 위기의 ‘사회적 자본’을 재건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한다. 그래도 미국은 기본적으로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자본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패권국으로서 미국이 구축한 기존의 사회적 자본만으로도 앞으로 한참 버틸 수 있다는 주장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환경 변화에 따른 사회적 자본의 재건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정작 걱정되는 것은 불신을 자초하는 한국 정부의 현실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 슬로건이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다. 진영이 반씩 양분된 가운데 어느 정권이건 슬로건 따로, 현실 따로였다는 것을 경험해온 국민이 얼마나 감동받을지 의문이다. 인수위가 국정과제를 추리고 있다지만 공약과의 불일치가 적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벌써부터 들려온다. 선거 때 이기려면 무슨 공약을 못 하겠느냐고 둘러댄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능력 중심’이라고 말하는 인사도 그렇다. 능력을 과거의 경력으로 볼 것이냐, 미래를 새롭게 정의하고 개척하는 힘으로 볼 것이냐는 천지차이다. 진영을 반씩 쪼갤 때마다 인재풀도 능력도 반감된다. 새 정부의 인사도 인수위도 정부 불신을 깨는 감동이 전혀 없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을 20대 대통령으로 소환하는 타임 슬립 TV 영화가 주목받을 정도다.
정부 불신은 정권 실패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사회의 선진화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란 주장도 있고, 정치가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정치가 사회를 불신으로 몰아가는 데 문화가 미래지향적으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정부가 10m 앞도 보지 못하는 사회가 창의와 혁신으로 넘쳐날 가능성은 없다. 한국 관료는 5년 뒤 자신의 안위를 염두에 둔 전략적 선택으로 돌아선 지 오래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은 혁신의 인프라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지금의 미국 실리콘밸리가 그 좋은 보기다. 신뢰가 자신이 아는 사람과 조직, 정치적 진영에 국한되는 순간 네트워크 확장은 제한된다. 신뢰 관계가 외부로 확산되지 않는다. 신뢰 확산 없이 ‘오픈 이노베이션’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양성’과 ‘개방성’이 요구되지만 한국 정치는 정반대 방향의 질주를 멈출 줄 모른다.
각국이 선점하려는 신산업 패러다임의 특징은 ‘탈(脫)중앙화’와 ‘민주주의’다. 헬스케어만 해도 병원을 꼭 찾아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개인의 진단 결정권이 확대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메타버스, 블록체인, 암호화폐도 마찬가지다. 오픈 네트워크 경제에서 ‘프로토콜’에 대한 신뢰는 필수적이다. 저(低)신뢰 사회는 네트워크 신산업에서 승산이 없다. 사회를 불신의 늪에서 구하는 정치로 가지 않으면 ‘디지털 플랫폼 정부’도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