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가·공사비 갈등으로 파행을 빚는 재건축 사업장이 늘면서 신탁사가 시행을 맡는 신탁 방식 재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자산신탁이 재건축을 추진하는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한경DB
분양가·공사비 갈등으로 파행을 빚는 재건축 사업장이 늘면서 신탁사가 시행을 맡는 신탁 방식 재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자산신탁이 재건축을 추진하는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한경DB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 아파트는 이달 중순 주민 75%의 동의를 받아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신탁 방식 재건축은 주민들이 설립하는 조합 대신 부동산 신탁사가 시행사를 맡아 사업비 조달부터 분양까지 모든 절차를 진행한다. 한양의 예비 신탁사로 선정된 KB부동산신탁 관계자는 “상반기 시행자 정식 지정을 거쳐 2024년 이주 및 철거, 2028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계획대로라면 통상 조합 설립에서 준공까지 최소 10년 이상 걸리는 사업 기간이 6년으로 대폭 단축된다.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된 서울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 사태를 계기로 신탁 방식 재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신탁사가 시행을 맡아 투명하게 사업을 관리하고, 조합 내분 등에 따른 사업 지연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사업 기간 대폭 단축

일반적인 재건축 사업은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조합이 시공사 선정과 각종 인허가, 분양 등 모든 절차를 맡아 진행한다. 이 같은 방식은 조합 집행부의 전문성이 떨어지고, 조합원 간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도 조율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각종 비리로 조합 집행부가 교체되면서 사업이 기약 없이 지연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사업이 지체되면 조합원의 분담금이 늘어 사업성이 떨어진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16년 법 개정을 통해 신탁 방식 재건축 제도를 도입했다. 신탁사를 시행사로 지정하려면 단지 전체 소유주의 75% 이상 동의와 동(棟)별 소유주의 50% 이상 동의를 확보하고, 토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신탁해야 한다.

신탁사가 시행을 맡으면 일단 조합을 설립하지 않아도 돼 추진위원회 구성에서 조합 설립 인가까지 걸리는 4년가량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시공사 선정은 ‘사업시행인가 후’에서 ‘시행자 지정 후’로 앞당겨지고, 자금력이 충분하지 않은 조합에 부담인 초기 사업비도 신탁사가 조달한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사업 초기 정비업체 선정 등의 과정에서 불거지기 쉬운 비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했다.

코리아신탁이 시행한 경기 안양시 동안구 진흥·로얄(현 한양수자인평촌리버뷰) 재건축 사업이 신탁 방식 재건축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아파트는 2016년 9월 시행자 지정 후 불과 5년 만인 작년 11월 준공했다. 서울에서는 관악구 봉천 1-1구역,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서대문구 북가좌 6구역, 은평구 불광 1구역 등이 신탁 방식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서울에선 아직 성공 사례 없어

신탁 방식이 모든 재건축 단지에 ‘만능 키’는 아니다. 2016년 서울 여의도에선 신탁 방식 재건축 붐이 일면서 시범 아파트를 시작으로 공작, 수정, 대교 등 6개 단지가 줄줄이 이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착공한 단지는 한 곳도 없다. 대교는 예비 신탁사 선정 후 5년이 지나도록 50%를 넘어야 하는 동별 동의율을 채우지 못했다. 광장은 사업 방식을 둘러싼 주민 간 대립으로 시행자 지정이 취소될 처지에 놓였다. 시범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를 피하기 위해 2017년 말까지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신청할 예정이었지만, 현재까지 시행자만 지정한 상태다. 서울에서 신탁 방식을 통해 사업을 완료한 곳은 아직 없다.

주민들로선 수십억~수백억원에 달하는 신탁 수수료도 부담이다. 신탁사는 보통 총분양금의 2~4%를 수수료로 받는다. 예상보다 더딘 사업 속도와 높은 수수료 때문에 서초구 신반포4차와 방배 7구역은 신탁 방식을 검토하다가 포기했다. 시행자 지정을 위해 토지 면적 3분의 1 이상을 신탁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도 신탁 방식 활성화를 막는 요인이다. 서울의 한 재건축 조합장은 “소규모 단지이거나 주민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곳은 조합 방식을 택하는 게 사업성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하헌형/이혜인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