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언젠가 세월이 가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과 작별한다. 그런데 세 가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크게 다르다고 한다.

추억, 선행, 종교가 그 세 가지다. 살아오는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기 이익만 좇으며 살았는지 남에게 선행도 베풀며 살았는지, 그리고 종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따라 인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필립보생태마을 관장인 황창연 신부의 말이다. 종교를 초월해서 그리고 무신론자들도 귀담아 들을 만한 말씀이다.

추억, 선행, 종교 중에서 두 번째인 선행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한 목적이나 의도 없이 마음이 우러나 착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뜻밖의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학비가 부족한 제자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약간의 금전을 지원해주고 잊고 있었는데, 십 몇 년쯤 지나 제자가 찾아와 지난 일을 말하며 그 때 도움을 주셨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는 순간, 뜻밖의 행복감이 몰려온다.

누구를 위해 쓰일지 모르면서 헌혈을 했는데, 며칠이 지난 다음 헌혈 인구가 늘었다는 뉴스를 우연히 보는 순간도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이밖에도 갑자기 행복감이 몰려오는 순간을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의 광고 ‘부활절 계란’ 편(2013)은 벌써 오래전에 나왔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상황에서 헌혈이 더 절박해진 현실을 다시 한 번 환기했다.

우크라이나의 광고회사 프로비드(Provid)에서 만든 이 광고에서는 피를 담는 헌혈 백을 계란 모양으로 표현했다. 부활절에는 보통 계란을 선물하는데, 헌혈 백을 통해 부활절 계란을 연상하도록 한 것이다.

카피는 이렇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피는 최고의 부활절 선물입니다(For someone your blood is the best holiday gift ever). 고맙습니다. 행복한 부활절.”

강렬한 호소력이 돋보이는 광고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 후 사흗날에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대축일에 신자들은 보통 삶은 계란을 먹는다.

이 전통은 빛의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 Easter)가 계란에서 탄생했다는 민간 설화를 초기 선교사들이 튜튼 족에게 전도하는 과정에서 차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계란은 새 생명과 부활을 뜻하는 상징이자 풍요로운 식품으로 인식되면서 부활 시기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광고에서는 부활절에 계란을 먹는 것도 좋겠지만, 누군가를 위한 헌혈이 가장 좋은 부활절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사랑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의 광고 ‘부활절 계란’ 편 (2013)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의 광고 ‘부활절 계란’ 편 (2013)
우크라이나 적십자사는 연말연시가 다가오자 또 다시 헌혈 권유 광고를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편(2013)을 보면 한 눈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양말 모양의 선물 꾸러미를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보통의 선물 꾸러미가 아닌 헌혈 백이다.

부활절 이후 약 8개월이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에 나온 광고인데도 ‘부활절 계란’ 편과 연계해서 광고를 만들었다.

카피는 이렇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피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For someone your blood is the best holiday gift ever). 고맙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행복한 새 해.”

모두의 마음이 들뜬 연말연시에도 급하게 피가 필요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피가 필요할 것인가.

그저 크리스마스를 즐기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보고 헌혈을 생각할 수도 있고, 미처 살피지 못한 어려운 이웃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다. 간명한 카피와 비주얼은 실천 행동에 즉각 영향을 미쳤으리라.

2013년에 제작된 광고지만, 휴일(Holiday)을 생일(Birthday)로 살짝 바꿔 지금 다시 광고를 재활용해도 좋겠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설득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의 광고 ‘크리스마스 선물’ 편 (2013)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의 광고 ‘크리스마스 선물’ 편 (2013)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의 전쟁이 시작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과정에서 가스 파이프라인의 중간에 위치한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가입을 추진하며 친 유럽 노선을 나타내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역사와 민족의 맥락에서 찾기도 하지만, 에너지 패권 다툼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그동안 미국과 중국이 경제 패권을 놓고 경쟁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패권 경쟁의 장이 미국과 러시아로 확장되고 있다.

어쨌든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광고를 다시 보니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헌혈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각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야겠지만 개인의 선행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는 많은 혈액이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나? 혈액이 얼마나 필요한지 대강의 정보도 없다.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웃 나라 폴란드로 도피했다. “선행은 모래 위에 씌어지고, 악행은 바위에 새겨진다.” 선행에 대한 폴란드 속담처럼, 모래 위에 씌어져 쉽게 사라져버려 남들이 알 수 없다 해도 더 많은 선행이 절실한 시기다.

선을 행하면 이웃도 모르지만 악을 행하면 백리까지 알려진다는 중국 속담도 있다. 원래 선행이란 남들 모르게 하는 것이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한 ‘헌혈 선행 캠페인’을 전개하기를 권고한다. 우리들은 그냥 남들 모르게 헌혈 캠페인에 참여하면 된다. 헌혈을 하고 나면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는 진한 행복감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이다.

부모들도 자녀의 선행 학습만 부추기지 말고, 선행(善行)을 선행(先行)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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