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석 칼럼] 현인과 기인 그리고 선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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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인문학의 딜레마를 깨야 한다.
인문학의 딜레마를 깨야 한다.
인문학의 발전 없으면 과학기술 발전 어렵고, 진정한 선진국으로 서기도 힘들다. 풍부한 상상력은 인간에게 추상성을 가지게 하여 고도의 철학 세계로 갈 수 있게 해 주는데, 그 바탕이 인문학이다.
인간을 갈증만 커지는 물질로부터 해방시켜 참 희열을 느끼게 하고 누리게 해 준다. 걸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이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인문학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도 제품도 나오고 선진 국가의 정책, 문화도 나온다.
인문학은 무수한 현인과 더불어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소수의 선견자를 탄생시키며, 동시에 많은 인간이 그러한 길을 가도록 안내해준다. 선견자는 대부분 당대에 현인으로부터 기인 취급을 받는 과정을 거친다.
종교와 철학, 미술과 음악, 문학과 역사 등 6가지 분야를 통틀어 대체로 인문학이라고도 한다. 종교 역시 인간의 근원 문제를 파고들며 각기 해법을 제시하여 인문학에 포함한다.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미래 "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이유를 최소한 4가지로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공감한다. 필자는 이를 3가지로 압축하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을 덧붙인다.
인간은 지속 생존과 불편한 문제 해결, 자유와 행복을 위해 끝없이 연구하고 투쟁하며 다음 시대로 건너갔다. 만약 인문학이 없었다면 인류는 그때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늘 그 정도 해법 수준에 머물러야 하고, 동물세계처럼 본능적인 반복만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인생의 목표를 숙고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정답이 아니라 대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건전한 비판의식을 키워야 한다. 종교와 철학 등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 놓고 어떠한 도전도 불허한다고 하면 인간 역시 우리, 틀, 진영 안에 갇힌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
눈을 뜨게 하는 인문학 없었다면 과거 왕조시대, 암흑의 중세시대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은 동족이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미개한 집단에 갇혀 살고 있어 안타깝다.
인간은 항상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리적 비판을 하면서 나아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무한 반복해야 개인이나 사회, 시대가 발전할 수 있다. 누군가는 먼저 나서서 피를 흘리는 희생을 하고 대중들이 뒤를 이어가면서 발전해왔다.
셋째, 선견(vision)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오로지 타고난 소수만이 선견자(先見者, visionary)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통념 때문에 후천적으로 선견자를 만든다는 일은 어리석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꽤 많은 선견자들의 삶과 과정을 통해 일반인도 그러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선견자로 사후나 생전에 인정받으려면 통상 기인(奇人)의 과정(평가)을 거친다. 왜냐하면 선견자는 자기 시대의 상식과 언어(정해진 의미)를 벗어나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반 대중과는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울 수도 있고 소외될 수도 있다.
종교에서는 선견자를 예언자(prophet)라 부르고 세속에서는 천재(genius)라고도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는 선견자들이 기인 취급을 받으며 늘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기인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선견자의 길을 가지 못한 어느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를 우리는 현학자나 현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전문가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끼리 합의된 공통 요령(학설)을 만들어 만족하고 학교나 사회에서 한 축을 이룬다. 이 현인들은 과거의 선견인은 신봉하면서 오히려 당대의 선견자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데 앞장선다. 왜냐하면 선견인은 현재와 미래를 보기 때문에 과거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현재를 보는 현인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월터 카우프만은 책에서 현학자는 ‘현미경 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와 유사한 유형이라고 했다. 이들은 엄밀함을 강조하지만 자칫 사소함에 매몰될 수 있다. 언론인은 즉각적 소비를 위한 글을 쓰며, 이들은 그 특성상 엄밀한 검토나 연구와 거리가 멀다(카우프만은 한나 아렌트가 이런 언론인 유형에 속한다고 비판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소크라테스 유형은 그 유일무이한 사례이자 모범이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합의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그 시대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희귀한 존재라고 하면서 선견자의 유형으로 보았다. 실제 4대 성인 중 한명으로 불린다.
지금 사는 세상이 모두가 만족하는 천국이라면 선견인은 필요 없다. 하지만 인간은 지속 생존,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오늘의 문제를 내일의 해법,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늘 그 시대의 선견인은 필요하다. 무수한 현인은 새 길을 만들거나, 그 문을 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견인처럼 이른바 시대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어렵다.
인문학은 일반 대중에게 감추어져 있는 선견자의 능력을 깨우쳐주거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기와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다. 따라서 아무리 첨단 인공지능 등 과학이 발전하는 세상에서도 선견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심어 놓은 과거 데이터를 가지고 머신 러닝(딥러닝)을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미래는 위 3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지속해야 한다.
한국 인문학의 위기에서 인문학을 다시 불러 낸 것은 인문학 학계가 아니라 한국의 기업이다. 왜냐하면 한국이 산업화 시대처럼 더 이상 상품이나 기술, 제도를 베낄 곳, 베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3차 산업 혁명기에는 변방의 후발 국가로 북극성과 같이 선진국을 멀리서 바라보고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4차 산업 혁명은 한국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기회는 잡았으나 자칫하여 한번 뒤처지면 따라갈 곳도 없고 따라잡을 수도 없다. 창의적이고 초 융복합 적이기 때문이다. 아예 2등 그룹은 지배를 당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이고 디지털 경제 시대이다.
그런데 창의는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오고 그 원천은 탄탄한 인문학에서 나온다. 인문학은 현실비판과 대안을 찾는 학문이니 시대 변천에 따른 새로운 기술과 제품은 과학자보다는 인문학자들의 상상력에서 먼저 나온다.
필자는 1960년 대 초등학교 시절에 공상과학 만화인 '우주소년 아톰'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 벌써 우주에서 레이저를 무기로 사용하고 모든 언어를 실시간으로 자동 번역하며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맹활약한다. 70여 년이 흘러 모두 현실이 되었는데 작가는 과학자가 아니라 데즈카 오사무라는 일본의 만화가였다.
기업들이 인문학에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찾으려는 시도는 적절하다. 다만 기업 특성상 인문학을 통해서 원하는 답을 급하게 찾으려 한다. 또 인문학이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하니 원하는 성과를 내기가 힘들면서 더디다는 점이다.
현대 대학 현장은 주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이 현학자 유형으로 채워졌다.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대학이 팽창하면서 선별을 위한 경쟁시험이 일반화되고 '정량 측정'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또 1957년 스푸트니크 충격이 실증주의의 확산을 가져오며 모든 학술적 진보가 자연과학 모델에 의존하게 됐다. 과학기술처럼 눈에 보이는 산출물이 우선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은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이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받은 과학기술 · 교육부문의 충격을 말한다.
이런 상황들은 현미경 주의에 대한 천착을, 지나친 전문화로 인한 지식의 분절을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연구중심대학·산학협력모델’ 시스템 아래 있는 인문학자들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오는 실상이다.
그동안 인문학은 당장 일자리, 사업에서 빠르게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릇된 인식 때문에 한국과 인류에 필요한 선견자와 소크라테스 유형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인문학의 딜레마였다.
그러다가 이제 개인, 기업, 국가들이 창의, 혁신, 게임 체인저, 범용기술, 글로벌 메가트렌드를 목마르게 찾으며 팽개쳐 놓은 인문학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면서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된다', '이등변 삼각형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기하학을 정리한 사람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생물학·동물학 등 자연을 주제로 다양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2200여 년이 지난 17세기 근대 과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뉴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도 위대한 과학자이면서 철학·신학·역사 등에 두루 관심을 두고 조예를 지닌 사상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고대·근대 철학의 활동분야는 인문사회, 자연과학을 구별하지 않았고 지적 탐구의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과거 철학자가 과학자였듯이, 다양하게 분화된 오늘날의 학문이 실제로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이학·공학 등 학문 분야에 관계없이 박사 학위자에게 Ph. D(Doctor of Philosophy)라고 칭하는 역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한 뿌리였던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너무나 다른 몸으로 변했다. 심지어 인문학은 과학기술의 효용성을 폄하하거나 과학기술은 인문학을 실용성 없는 허황한 이론으로 과소평가하는 갈등까지 나타나고 있다. 학문의 세분화, 전문화는 필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창의성은 인문학 바탕 없이는 힘들다.
과학기술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추구를 위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업적 과학에만 몰두하면 돈벌이는 될 지 언정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괴물들을 양산하게 된다. 더구나 과학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식물과 지구를 정복의 대상으로 다뤄왔다. 그 결과 코로나 팬데믹, 이상기온 등의 폐해로 자연은 받은 그대로 복수한다. 지금 각처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이제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 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지식과 지혜는 인문학과 과학기술로 구분하지 않는다. 생태주의 관점의 자연과학자가 있고, 자본주의의 원리에 투철한 기능 주의자가 있다. 전자는 생물학자, 후자는 사회학자라고 불린다.
인문학의 위기는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충돌에 있다. 이 속에서 인문학은 인간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현실을 사는 인간과 자본주의를 만족시켜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에 들어섰다. 불행히도 한국은 독자적인 과학기술이나 내세울 만한 문화를 독창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대부분 남의 것을 모방하여 더 빨리, 더 크게, 더 싸게 만드는데 최고 수준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발전이 있을 리 없다. 선진문화, 선진과학을 주도하려면 아주 탄탄한 인문학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풍부한 상상력,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추상과 철학은 인문학의 바탕이 없이는 지금처럼 베끼는 구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대학에 문과 이과를 융합하는 추세는 실질적으로 확대, 심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인문학은 국가가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것처럼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한다. 지금 당장 열매를 많이 나게 하는 거름과 비료는 없다. 가을에 수확하는 심정으로 인문학에 투자하여야 한다.
인문학을 학문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실패'가 발생하는 부문이다. 시장실패( market failure)는 경제학에서 시장기구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주택시장과 같은 곳으로 정부는 반드시 개입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선진문화, 질 높은 한국사회와 창의와 선견자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정부는 과학기술에 투자하듯이 인문학 육성에 돈을 써야한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교육부가 대학을 어정쩡한 평가로 통제권을 쥐려는 선심성·당근용 돈 풀기는 안된다. 정교한 마스터플랜이 필요한 영역이다.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이 되면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학이 발전하여 상업고교, 경제와 경영대학으로 인재들이 몰리며, 상공업이 활성화하고 자본 축적에 따라 자본가들이 생기면서 금융과 경영학이 발전하게 된다.
재벌을 포함한 자본가 기업과 노동자들 간의 부(소득)의 분배 문제가 생기면서 사회학, 신문방송학, 정치학이 발전하면서 민주주의와 언론, 노동조합이 번성하게 되며, 기업이 시장(기술, 제품)의 한계에 봉착하여 새로운 사업을 위한 창의성이 필요할 때 인문학, 특히 신화 등 관련 학문이 득세한다.
이 단계는 개인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좀 벗어나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철학이 융성해지면서 병행하여 나라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지구 전체 즉 세상을 하나로 보려는 고고학, 인류학이 발전한다. 자신의 나라 안에서만 바라보는 좁은 시각이 아닌, 패권적 시각으로 세계 전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자국의 이익을 찾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이 선진국의 문턱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가 바로 이 시점에 이르렀다. 인문학의 발전 없이 디지털 혁명시대 과학기술 발전 없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지도 않으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인간 중심의 자유와 행복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풍부한 상상력은 고도의 추상세계로 인간을 올라가게 하며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 바탕은 인문학에 있다고 천 번을 주장해도 부족하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인간을 갈증만 커지는 물질로부터 해방시켜 참 희열을 느끼게 하고 누리게 해 준다. 걸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이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인문학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도 제품도 나오고 선진 국가의 정책, 문화도 나온다.
인문학은 무수한 현인과 더불어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소수의 선견자를 탄생시키며, 동시에 많은 인간이 그러한 길을 가도록 안내해준다. 선견자는 대부분 당대에 현인으로부터 기인 취급을 받는 과정을 거친다.
종교와 철학, 미술과 음악, 문학과 역사 등 6가지 분야를 통틀어 대체로 인문학이라고도 한다. 종교 역시 인간의 근원 문제를 파고들며 각기 해법을 제시하여 인문학에 포함한다.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미래 "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이유를 최소한 4가지로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공감한다. 필자는 이를 3가지로 압축하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을 덧붙인다.
인문학 필요한 3가지 이유
인문학을 가르치는 이유 첫 번째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보전하고 육성하는 일이다. 인류 문명은 신(神)이 만든 자연법칙을 포함한 우주원리와 인간의 지식, 지혜가 만든 기술, 과학이 어우러져 발전해왔다.인간은 지속 생존과 불편한 문제 해결, 자유와 행복을 위해 끝없이 연구하고 투쟁하며 다음 시대로 건너갔다. 만약 인문학이 없었다면 인류는 그때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늘 그 정도 해법 수준에 머물러야 하고, 동물세계처럼 본능적인 반복만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인생의 목표를 숙고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정답이 아니라 대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건전한 비판의식을 키워야 한다. 종교와 철학 등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 놓고 어떠한 도전도 불허한다고 하면 인간 역시 우리, 틀, 진영 안에 갇힌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
눈을 뜨게 하는 인문학 없었다면 과거 왕조시대, 암흑의 중세시대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은 동족이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미개한 집단에 갇혀 살고 있어 안타깝다.
인간은 항상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리적 비판을 하면서 나아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무한 반복해야 개인이나 사회, 시대가 발전할 수 있다. 누군가는 먼저 나서서 피를 흘리는 희생을 하고 대중들이 뒤를 이어가면서 발전해왔다.
셋째, 선견(vision)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오로지 타고난 소수만이 선견자(先見者, visionary)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통념 때문에 후천적으로 선견자를 만든다는 일은 어리석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꽤 많은 선견자들의 삶과 과정을 통해 일반인도 그러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선견자로 사후나 생전에 인정받으려면 통상 기인(奇人)의 과정(평가)을 거친다. 왜냐하면 선견자는 자기 시대의 상식과 언어(정해진 의미)를 벗어나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반 대중과는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울 수도 있고 소외될 수도 있다.
종교에서는 선견자를 예언자(prophet)라 부르고 세속에서는 천재(genius)라고도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는 선견자들이 기인 취급을 받으며 늘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기인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선견자의 길을 가지 못한 어느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를 우리는 현학자나 현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전문가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끼리 합의된 공통 요령(학설)을 만들어 만족하고 학교나 사회에서 한 축을 이룬다. 이 현인들은 과거의 선견인은 신봉하면서 오히려 당대의 선견자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데 앞장선다. 왜냐하면 선견인은 현재와 미래를 보기 때문에 과거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현재를 보는 현인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월터 카우프만은 책에서 현학자는 ‘현미경 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와 유사한 유형이라고 했다. 이들은 엄밀함을 강조하지만 자칫 사소함에 매몰될 수 있다. 언론인은 즉각적 소비를 위한 글을 쓰며, 이들은 그 특성상 엄밀한 검토나 연구와 거리가 멀다(카우프만은 한나 아렌트가 이런 언론인 유형에 속한다고 비판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소크라테스 유형은 그 유일무이한 사례이자 모범이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합의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그 시대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희귀한 존재라고 하면서 선견자의 유형으로 보았다. 실제 4대 성인 중 한명으로 불린다.
지금 사는 세상이 모두가 만족하는 천국이라면 선견인은 필요 없다. 하지만 인간은 지속 생존,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오늘의 문제를 내일의 해법,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늘 그 시대의 선견인은 필요하다. 무수한 현인은 새 길을 만들거나, 그 문을 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견인처럼 이른바 시대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어렵다.
인문학은 일반 대중에게 감추어져 있는 선견자의 능력을 깨우쳐주거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기와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다. 따라서 아무리 첨단 인공지능 등 과학이 발전하는 세상에서도 선견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심어 놓은 과거 데이터를 가지고 머신 러닝(딥러닝)을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미래는 위 3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지속해야 한다.
선견자 설 자리 없는 인문학의 딜레마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 라는 말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하였다.한국 인문학의 위기에서 인문학을 다시 불러 낸 것은 인문학 학계가 아니라 한국의 기업이다. 왜냐하면 한국이 산업화 시대처럼 더 이상 상품이나 기술, 제도를 베낄 곳, 베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3차 산업 혁명기에는 변방의 후발 국가로 북극성과 같이 선진국을 멀리서 바라보고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4차 산업 혁명은 한국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기회는 잡았으나 자칫하여 한번 뒤처지면 따라갈 곳도 없고 따라잡을 수도 없다. 창의적이고 초 융복합 적이기 때문이다. 아예 2등 그룹은 지배를 당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이고 디지털 경제 시대이다.
그런데 창의는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오고 그 원천은 탄탄한 인문학에서 나온다. 인문학은 현실비판과 대안을 찾는 학문이니 시대 변천에 따른 새로운 기술과 제품은 과학자보다는 인문학자들의 상상력에서 먼저 나온다.
필자는 1960년 대 초등학교 시절에 공상과학 만화인 '우주소년 아톰'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 벌써 우주에서 레이저를 무기로 사용하고 모든 언어를 실시간으로 자동 번역하며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맹활약한다. 70여 년이 흘러 모두 현실이 되었는데 작가는 과학자가 아니라 데즈카 오사무라는 일본의 만화가였다.
기업들이 인문학에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찾으려는 시도는 적절하다. 다만 기업 특성상 인문학을 통해서 원하는 답을 급하게 찾으려 한다. 또 인문학이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하니 원하는 성과를 내기가 힘들면서 더디다는 점이다.
현대 대학 현장은 주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이 현학자 유형으로 채워졌다.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대학이 팽창하면서 선별을 위한 경쟁시험이 일반화되고 '정량 측정'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또 1957년 스푸트니크 충격이 실증주의의 확산을 가져오며 모든 학술적 진보가 자연과학 모델에 의존하게 됐다. 과학기술처럼 눈에 보이는 산출물이 우선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은 1957년 10월 4일 소비에트 연방이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받은 과학기술 · 교육부문의 충격을 말한다.
이런 상황들은 현미경 주의에 대한 천착을, 지나친 전문화로 인한 지식의 분절을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연구중심대학·산학협력모델’ 시스템 아래 있는 인문학자들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오는 실상이다.
그동안 인문학은 당장 일자리, 사업에서 빠르게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릇된 인식 때문에 한국과 인류에 필요한 선견자와 소크라테스 유형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인문학의 딜레마였다.
그러다가 이제 개인, 기업, 국가들이 창의, 혁신, 게임 체인저, 범용기술, 글로벌 메가트렌드를 목마르게 찾으며 팽개쳐 놓은 인문학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위대한 철학자 대부분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런데 곰곰이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탈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등 위대한 철학자는 대부분 위대한 과학자였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는 윤리학·논리학·형이상학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현상의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여 체계적으로 지식을 형성하고자 한 과학자이기도 했다.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면서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된다', '이등변 삼각형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기하학을 정리한 사람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생물학·동물학 등 자연을 주제로 다양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2200여 년이 지난 17세기 근대 과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뉴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도 위대한 과학자이면서 철학·신학·역사 등에 두루 관심을 두고 조예를 지닌 사상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고대·근대 철학의 활동분야는 인문사회, 자연과학을 구별하지 않았고 지적 탐구의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과거 철학자가 과학자였듯이, 다양하게 분화된 오늘날의 학문이 실제로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이학·공학 등 학문 분야에 관계없이 박사 학위자에게 Ph. D(Doctor of Philosophy)라고 칭하는 역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문학과 과학기술 융합하고 과학기술 투자하듯 정부 나서야!
그러나 16·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과학기술(이과)과 인문학(문과)은 상반되고 분리가 당연시됐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전문화되고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면서 이과와 문과의 인위적 구분과 분업이 필요했다.20세기가 끝날 무렵 한 뿌리였던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너무나 다른 몸으로 변했다. 심지어 인문학은 과학기술의 효용성을 폄하하거나 과학기술은 인문학을 실용성 없는 허황한 이론으로 과소평가하는 갈등까지 나타나고 있다. 학문의 세분화, 전문화는 필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창의성은 인문학 바탕 없이는 힘들다.
과학기술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추구를 위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업적 과학에만 몰두하면 돈벌이는 될 지 언정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괴물들을 양산하게 된다. 더구나 과학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식물과 지구를 정복의 대상으로 다뤄왔다. 그 결과 코로나 팬데믹, 이상기온 등의 폐해로 자연은 받은 그대로 복수한다. 지금 각처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이제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 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지식과 지혜는 인문학과 과학기술로 구분하지 않는다. 생태주의 관점의 자연과학자가 있고, 자본주의의 원리에 투철한 기능 주의자가 있다. 전자는 생물학자, 후자는 사회학자라고 불린다.
인문학의 위기는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충돌에 있다. 이 속에서 인문학은 인간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현실을 사는 인간과 자본주의를 만족시켜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에 들어섰다. 불행히도 한국은 독자적인 과학기술이나 내세울 만한 문화를 독창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대부분 남의 것을 모방하여 더 빨리, 더 크게, 더 싸게 만드는데 최고 수준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발전이 있을 리 없다. 선진문화, 선진과학을 주도하려면 아주 탄탄한 인문학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풍부한 상상력,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추상과 철학은 인문학의 바탕이 없이는 지금처럼 베끼는 구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대학에 문과 이과를 융합하는 추세는 실질적으로 확대, 심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인문학은 국가가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것처럼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한다. 지금 당장 열매를 많이 나게 하는 거름과 비료는 없다. 가을에 수확하는 심정으로 인문학에 투자하여야 한다.
인문학을 학문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실패'가 발생하는 부문이다. 시장실패( market failure)는 경제학에서 시장기구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주택시장과 같은 곳으로 정부는 반드시 개입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선진문화, 질 높은 한국사회와 창의와 선견자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정부는 과학기술에 투자하듯이 인문학 육성에 돈을 써야한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교육부가 대학을 어정쩡한 평가로 통제권을 쥐려는 선심성·당근용 돈 풀기는 안된다. 정교한 마스터플랜이 필요한 영역이다.
한국, 이제 인문학이 필요한 시대다.
한 나라의 발전 과정을 사회현상 변화와 인기 학문, 직업으로 살펴보면, 초기 나라를 만드는 전쟁 때에는 군사학이 발전하고, 군인들이 득세하여 육군사관학교 등이 인기가 있다. 전쟁 후 사회 혼란기에는 질서를 위하여 법학이 발전하면서 경찰 및 검, 판사들이 득세한다.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이 되면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학이 발전하여 상업고교, 경제와 경영대학으로 인재들이 몰리며, 상공업이 활성화하고 자본 축적에 따라 자본가들이 생기면서 금융과 경영학이 발전하게 된다.
재벌을 포함한 자본가 기업과 노동자들 간의 부(소득)의 분배 문제가 생기면서 사회학, 신문방송학, 정치학이 발전하면서 민주주의와 언론, 노동조합이 번성하게 되며, 기업이 시장(기술, 제품)의 한계에 봉착하여 새로운 사업을 위한 창의성이 필요할 때 인문학, 특히 신화 등 관련 학문이 득세한다.
이 단계는 개인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좀 벗어나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철학이 융성해지면서 병행하여 나라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지구 전체 즉 세상을 하나로 보려는 고고학, 인류학이 발전한다. 자신의 나라 안에서만 바라보는 좁은 시각이 아닌, 패권적 시각으로 세계 전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자국의 이익을 찾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이 선진국의 문턱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가 바로 이 시점에 이르렀다. 인문학의 발전 없이 디지털 혁명시대 과학기술 발전 없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지도 않으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인간 중심의 자유와 행복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풍부한 상상력은 고도의 추상세계로 인간을 올라가게 하며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 바탕은 인문학에 있다고 천 번을 주장해도 부족하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박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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