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떠들썩하게 자랑하던 ‘K방역’을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폐기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엔데믹(풍토병화) 선포가 임기 만료를 앞둔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돼버렸다. 심지어 코로나19를 감염병 2등급으로 하향 조정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하기로 한단다. 국민들은 모처럼 되찾은 자유에 환호하고 있다. 되돌아온 손님들을 맞이하는 자영업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쏟아져 나온 자동차로 꽉 막힌 퇴근길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코로나19의 상황은 만만치 않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프랑스·독일·미국 등의 사정이 불안하고, 새로운 변이에 의한 급격한 재확산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성급한 일상 회복이 새 정부가 시도하는 과학 방역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감염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검사를 포기해버리면 정확한 감염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과학적 방역이 불가능해진다. 한 번 느슨해진 방역의 고삐를 다시 다잡는 일도 쉽지 않다.

인류의 역사가 ‘코로나 이전 시대(BC·Before COVID19)’와 ‘코로나 이후 시대(AC·After COVID19)’로 구분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었다. 이제 막 시작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과거와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충격적인 기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비대면·비접촉’ 문화를 원할 것이다. 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재택근무·원격교육·원격진료·배달산업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물론 초지능·초연결·초현실을 지향하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부분적으로 비대면·비접촉의 새로운 문화를 더욱 강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대면과 접촉을 갈망하는 인간의 태생적 본능은 함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무실·학교·식당·주점은 여전히 번성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방역 해제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특수로 기록적인 호황을 누렸던 배달 시장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점주와 소비자들이 모두 배달 앱의 갑질과 탐욕에 신물이 나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가와 유류비까지 치솟으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자영업자·배달원·소비자의 불만이 격하게 폭발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과연 온라인 배달산업이 지속가능한 모습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환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경계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무모한 개발과 환경 파괴로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이 잦아지게 됐다는 주장은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억지다. 바이러스·박테리아(세균)의 변이는 인간 활동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상적인 자연 현상이다. 심지어 인간도 변종에 의해 진화한다는 것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바이러스가 의도적으로 인간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깨끗하게 지키고 보전한다고 감염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감염병은 군집(群集) 생활을 하는 모든 생물에게 숙명적인 일이다. 18세기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일으켰던 잎마름병도 곰팡이에 의한 감염병 때문이었다. 꿀벌도 응애에 의한 세균 감염으로 몰살했다.

코로나19의 고통이 우리에게 몹시 힘겨웠던 것은 사실이다. 인구의 32.7%가 감염되고, 2만 명이 넘는 이웃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아픈 기억도 빠르게 잊히게 된다. 세월이 약이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 세기 전에 우리를 훨씬 더 심각하게 괴롭혔던 스페인 독감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2003년), 신종플루(2009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2015년)의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너무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위태로운 경제 상황을 바로잡는 노력이 훨씬 더 절박하다. 무차별적인 탈원전·탄소중립에 망가져 버린 에너지·전력 정책을 합리적으로 복구하고, 무너져버린 글로벌 경제 체제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국가 혁신전략에 올인해야 한다.